리바이어던(Leviathan) 제 5 장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4 장에서…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5 장






레기움(Regium) 행성, 

삼니움 지역(Samnium Province),

자으락스(Zarax)의 요새 도시



루코(Luco)는 경련이 서서히 온몸을 좀먹어 가자, 

사지를 번갈아 가며 쭈욱 뻗어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어주었다. 

지금 그가 피신처로 사용하고 있는 동굴은 

동굴이라기보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한켠에 난 좁다란 벽감처럼 매우 비좁은 곳이었기에 

온몸을 웅크려야 겨우 자리를 잡고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덩이였다.

그 옆으로 대략 40~50 피트[약 12~15미터(m)]의 깎아 세운 듯이 가파른 절벽 아래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수해(樹海)가 보였다.


루코(Luco)는 번성하고 있는 가지들 사이, 그러니까 저 무성한 숲의 바닥까지는 

수렁처럼 훨씬 더 깊은 나락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칫 잘못해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가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뱀처럼 긴 몸뚱이에 날개가 돋아난 형상을 가진 오얼랩(Orlap)들이 

이 절벽 면 전체에 걸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오얼랩(Orlap) 성체 대부분은 그보다 훨씬 큰 몸집을 가졌으며,

근력 자체도 대단하지만, 치악력도 엄청난 종족이었기에 

이빨이 한가득한 놈들의 턱뼈는 그를 단숨에 찢어발길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야생 포식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매우 신경질적인 생명체였다.

이 때문에 그가 부주의하게 움직이기라도 하면,

놈들은 끔찍한 소음과 함께 폭발하듯 둥지에서 뛰쳐나와 대기를 비명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 소음의 근원이 폭력과 유해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된 십대처럼,

혈혈단신인 인간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놈들이 알아차릴 때까지 말이다.

그 뒤엔 누가 그를 잡아먹을지를 두고, 놈들 사이에서 광란의 혈투가 벌어질 것이다.


루코(Luco)는 자신이 절벽 면에 혼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해낸 다른 경쟁자들이, 

오얼랩(Orlap) 성체가 사냥하러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틈을 노리려고, 

자신처럼 숨죽이고 벼랑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지가 궁금했다.


오얼랩(Orlap) 머리 하나면 피의 시험(Blood trial)을 통과하고도 남겠지만,

루코(Luco)는 오얼랩(Orlap) 성체와 당당하게 겨루기에는 아직 힘과 기술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이틀 동안 절벽 구덩이에 죽치고 앉아, 의미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루코(Luco)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 오얼랩(Orlap)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지망생 중에 그처럼 생물의 행동에 대해 진득하게 앉아 연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개중에 루코(Luco)처럼 포식자들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족이 사망한 이후 그에게 이것은 일종의 집착이 되어버렸고,

이 강박 덕분에 그는 모든 방면에 있어 누구보다 뛰어난 지망생이 되어있었다.

따라서 다른 지망생 중 누구도, 

특별한 산비탈에만 서식하는 이 날아다니는 뱀이 더 막강한 포식자의 사냥감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그때, 루코(Luco)가 숨어있는 구멍 바로 아래에서 비명이 울렸다.

수많은 오얼랩(Orlap)들이 동시에 빽빽거리며 울어 대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본 루코(Luco)는 자신의 인내가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포식자 하나가 비탈면에 들러붙어서는 닥치는 대로 오얼랩(Orlap)을 입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키질(Kizil)은 단단한 비늘이 피부를 보호하고, 

넝마 같은 날개로 퍼덕거리며 날아다닌다는 점에서,

오얼랩(Orlap)과 외형상 상당히 흡사해 보였지만,

크기 면에서 볼 때 키질(Kizil)의 덩치는 오얼랩(Orlap)보다 열 배는 더 컸으며,

식욕 면에서는 오얼랩(Orlap)보다 열 배는 더 굶주렸다.


눈이 뒤집힌 키질(Kizil)은 

날개를 격렬하게 떨며 바위 절벽을 제멋대로 오가면서, 

맹렬한 속도로 일방적인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놈은 벌써 허기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오얼랩(Orlap)을 죽였지만, 

앞발을 멈추지 않은 채, 그저 살육을 즐기고 있었다.

먹히지도 못한 채 지나치게 도륙된 희생물들은 수해 위로 속절없이 버려졌다.

키질(Kizil)의 흉포성은 경악할만한 수준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생물체의 경이로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루코(Luco)도 살아있는 키질(Kizil)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경외감마저 드는 이 생명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키질(Kizil)을 포식자 중에서도 그 정점에 있는 생물이었다.

너무나 성공적으로 진화한 나머지 동시대의 어떤 생명체보다도 긴 수명을 자랑했다.

방패 같은 비늘로 덮여있는 키질(Kizil)의 가죽을 뚫어 버릴 수 있는 건,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지금 루코(Luco)가 허리에 차고 있는 이빨이 그중 하나였다.


루코(Luco)는 이빨을 뽑아 들고는 은신처에서 뛰쳐나왔다.

더 이상 숨어서 숨죽일 필요가 없었다.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인 오얼랩(Orlap)에겐 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고산지대라 조금만 움직였음에도 루코(Luco)는 숨이 턱까지 차 헉헉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에 겨우 억누르던 경련이 순식간에 사지로 번졌다.

루코(Luco)는 이빨로 만든 칼을 입에 물고, 

사냥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엉금엉금 기다시피 절벽 꼭대기에 올랐다.

그는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했다.


물론 루코(Luco) 말고 다른 지망생들은 

그처럼 절벽 틈바구니에 시체처럼 숨어있다가 사냥할 염두도 못 내겠지만,

우연히 근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발견했다면,

그에게서 탐스러운 과실을 가로채려 할 수 있었다.

거기에 포식한 키질(Kizil)은 금세라도 둥지로 돌아갈 태세였다.

벼랑 끝에서 잠깐 안정을 취한 루코(Luco)는 

한 손에 이빨로 만든 칼을 움켜쥐고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귀에 익숙한 신호가 천 길 낭떠러지를 타고 메아리쳤다.

그건 맹금류의 울음소리 같았지만, 루코(Luco)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절친인 바으라카(Baraca)에게 가르쳐준 특별한 휘파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를 부르기 위해 약속한 신호였다.


바으라카(Baraca)가 지금, 이 신호를 보냈다는 건,

그것도 그들의 운명을 좌우할 시험 도중, 이 신호를 보냈다는 건,

그가 아주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었다.


루코(Luco)는 신호를 애써 무시하려 했다.

성공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해 줄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것만 성공하면 그는 스페이스 마린 후보생(Aspirant)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죽음의 천사가 될 수 있었다.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신호가 메아리쳤다.

이번 신호는 조금 전보다 훨씬 절박했다.

소리로 추측해 보건대 신호가 발신되는 위치는 루코(Luco)의 바로 아래, 

그러니까 수해의 녹색 차양 아래였다.


루코(Luco)는 마음속으로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절호의 기회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들었지만,

간절히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구를 못 본 체 무시할 수는 없었다.


루코(Luco)는 기습을 포기하고 조심스럽게 절벽 면을 따라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 내려가지도 못했을 때, 

갑자기 발밑이 무너지면서 돌이 떨어지더니, 

이내 돌무더기로 변해 절벽을 시끄럽게 울리며 떨어졌다. 

이 작은 산사태에 오얼랩(Orlap)을 헤집던 키질(Kizil)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놈은 살덩이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턱을 들어 올리더니, 갑작스레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키질(Kizil)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더니 그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 와중에도 키질(Kizil)의 입 주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루코(Luco)는 잠시 머리를 굴려보다가 키질(Kizil)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행동에 나섰다.

그는 거리를 가늠한 뒤, 바로 절벽에서 도약해 키질(Kizil)의 등 위로 뛰어내렸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키질(Kizil)이 포효하더니,

발톱으로 절벽을 밀치면서 벼랑에서 떨어져 나와 날개를 펼쳤다.

놈의 양 날개 한가운데에 착지한 루코(Luco)는 

일격을 날리기 위해 이빨로 만든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키질(Kizil)은 제자리에서 몸을 비틀어 루코(Luco)를 돌벽에 처박았다. 

하지만 루코(Luco)는 떨어지는 대신, 어떻게든 놈의 어깨 부위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키질(Kizil)은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절벽 면에서 뛰어내리더니,

수해 위로 기다란 핏줄기를 남기며 날아올랐다.


그 기세에 튕겨 나간 루코(Luco)는 망가진 수레바퀴처럼 옆으로 빙빙 돌며, 

멀리 떨어진 나무를 향해 하염없이 떨어졌다.

나무 꼭대기에 부딪히는 찰나, 그의 온몸은 참기 어려운 고통에 휩싸였다.

루코(Luco)는 이리저리 긁히면서 셀 수 없이 많은 가지들 사이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바으라카(Baraca)가 숲 아래에서 또다시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뭔가가 그의 두개골을 바스러뜨리는 바람에 

루코(Luco)의 의식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루코 불티스(Luco Vultis)는 눈꺼풀 사이로 명멸하는 불빛을 느꼈다.


"바으라카(Baraca)?"


의무관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불티스(Vultis)는 지금 여기가 어디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떠올리려 애썼다.

의무관은 귀에 익숙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의무관에게 친숙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으락스(Zarax)의 의관(醫官; Chirurgeon) 쿠안드(Quand)였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쿠안드(Quand)의 따듯한 얼굴을 떠올리자, 

불티스(Vultis)의 머릿속엔 다른 기억들이 덩달아 되살아났다.

의무관은 더 이상 오얼랩(Orlap)을 뒤쫓던 십대가 아니었다.

그건 벌써 수년 전의 일이었다.

사실 그는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불티스(Vultis)는 울트라마린(Ultramarine)의 일원으로

그가 한때 속했었던 인류를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죽음의 천사였다.

그런 그에게 불현듯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게 된 이유는 

오직 황제만이 아실 터였다.


물론 불티스(Vultis)가 떠올린 그날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날이긴 했다.

바로 그가 울트라마린 후보생(Ultramarine Aspirant) 자리를 확보한 날이었다.

바으라카(Baraca)를 향한 그의 목숨을 건 동료애가 인정받았던 것이다.


불티스(Vultis)와 같은 시기에 시험을 친 지망생 중, 

그를 포함해 오직 두 명만이 후보생(Aspirant)으로 선출되었는데,

다른 한 명은 바으라카(Baraca)였다.


"마취 후유증 때문에 아마 처음 며칠 동안은 가끔 혼란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신체는 빠르게 회복하고 있군요."


쿠안드(Quand)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동면기의 안전장치가 완벽하게 작동한 덕분입니다.

불시착 때 입은 부상으로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수술은 완벽하게 잘 끝났습니다.

여길 나갈 때까지 절 다시 볼 필요는 없을 거예요."


불티스(Vultis)가 눈을 뜨자 특색 없는 병실 천정이 눈에 들어오면서 기억이 점차 돌아왔다.


쿠안드(Quand)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가죽처럼 거친 피부를 가면처럼 이용해, 

잉크처럼 검은 눈동자 주변의 울음을 터뜨릴 듯이 일그러진 얼굴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었지만, 

불티스(Vultis)는 그녀가 방패처럼 두르고 있는 웃음 뒤에 숨겨진 슬픔을 볼 수 있었다.


향유를 먹여 반지르르해진 머리를 뒤로 넘겨 질끈 묶은 쿠안드(Quand)는

레기움 군무원(Regium Auxilia)들이 착용하는 세련된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의료용으로 개조된 한쪽 팔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녀의 인공 팔에는 인상적인 네 가지 수술용 도구가 달려있었는데,

수술용 플라이어, 수술용 포셉, 수술용 메스 그리고 수술용 집게가 바로 그것이었다.


불티스(Vultis)는 

무영등의 불빛을 반사하는 쿠안드(Quand)의 머리 반사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반사경에 보이는 자신은 의외로 외형상 거의 다친 부분이 없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새로운 상처가 몇 군데 보였지만, 심각해 보이는 부분은 전혀 없었다.


불티스(Vultis)의 외모는 거의 그대로였다.

그의 넙데데하고 긴 직사각형의 늘 울상인 얼굴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술 때문에 머리털들을 제모했었을 게 분명한데도 

벌써 그의 얼굴에선 모발들이 새까만 잔디처럼 피부 위로 송글송글 올라오고 있었다.


"방문객이 와 계십니다."


쿠안드(Quand)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방문객이 보이도록 자리에서 물러났다.


불티스(Vultis)가 누워있는 회복실에는

바퀴가 달린 환자 수송용 들것과 윙윙대는 의료기기들, 

그리고 수술 도구들이 어지럽게 흐트러진 탁자가 놓여있었지만, 결코 작은 방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대장 캐스타몬(Castamon)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

회복실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좁다란 하꼬방처럼 보였다.


완전무장 태세의 캐스타몬(Castamon)은 전투 헬멧만 벗은 상태였다.

눈치가 빠른 불티스(Vultis)는 지휘관의 눈에 떠오른 안도감을 볼 수 있었다.


"몸이 좀 나아졌나 보군."


중대장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얼굴만 봐도 알겠네."


평소처럼, 중대장을 독대한 불티스(Vultis)는 

캐스타몬(Castamon)의 시선이 자신의 영혼을 한 꺼풀씩 벗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의무관의 머리에선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을 잃었다는 불명예가 떠올랐다.

타격 순양함과 형제들, 그리고 함대의 상실을 자책하는 건, 

자신의 회복을 늦추는 길이라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억눌렀던 기억들이 

캐스타몬(Castamon)의 찌르는 듯한 눈길을 마주하는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용서해 주십시오."


의무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하자,

캐스타몬(Castamon)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중대장은 거칠게 머리를 흔들어 부정했다.


"정신 차리게, 루코(Luco), 자네가 사과할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중대장님 저와 바으라카(Baraca)는 퇴함하지 말았어야…"


"내게 진실을 말해주기 위해 내린 자네의 결단은 

마지막까지 형제들과 옥쇄하겠다는 각오보다 훨씬 고결한 것이네,

난 그 순간에 내린 자네의 판단이 옳았다고 봐.

그 상황에서 한 명이 더 폭사한다고 해서 전황이 뭐가 달라지겠나?

내가 보기엔 헛된 자만심으로 목숨을 던지는 것보다 

적절한 순간 퇴각한 자네의 결정이 전략적으로 훨씬 가치 있는 일이야.

또 내가 듣기에 자네는 우리의 결점을 보완해줄 만한 샘플도 안전하게 확보했다지 아마.

게다가 마지막까지 정신을 놓치지 않고, 

쿠안드(Quand)에게 자네가 소해정에 싣고 돌아온 바으라카(Baraca)가 

지금 반혼수 상태라는 것과 상태 설명도 직접 했다고 하더군."


"바으라카(Baraca)도 회복되었습니까?

지금 잘 지내고 있나요?"


그 말에 둘이 대화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캐스타몬(Castamon)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바으라카(Baraca)의 건강 문제와 관련해서 '잘'이란 단어를 쓰기엔 이르다고 보지만,

타나으로(Tanaro) 병장은 바으라카(Baraca)가 곧 임무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더군."


캐스타몬(Castamon)은 불티스(Vultis)의 상처를 살피며 말했다.


"자네가 무의미한 영웅적인 희생을 감행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의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 헤매고 있었겠지.

그때 레기움(Regium)으로 귀환하겠다고 결정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을 거야.

자네의 혜안 덕분에 우리는 귀중한 샘플을 마련할 수 있었어.

난 자네가 가져온 샘플이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서 승리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네."


"하지만 전 제 사명을 저버렸습니다.

대학살의 현장에서 형제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대신 도망쳤습니다."


캐스타몬(Castamon)이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그딴 거에 집착하지 마.

자네의 성과에 비하면, 그건 아무런 가치도 없어."


불티스(Vultis)에게 캐스타몬(Castamon)의 칭찬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지만,

중대장의 엄한 꾸짖음은 오히려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불티스(Vultis)는 크게 심호흡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의무관은 주먹을 쥐어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뭔가 머릿속이 복잡했었습니다만,

중대장님 덕분에 이제 말끔해졌습니다."


캐스타몬(Castamon)은 한층 밝아진 의무관을 다시 살폈다.

중대장의 시선은 먹이를 쫓는 독수리의 눈처럼 빠르고 강렬했다.


"평소처럼 쿠안드(Quand)가 실력 발휘를 좀 했나 보군.

더 이상 수술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고 하던데."


"지금 당장이라도 복귀할 수 있습니다."


캐스타몬(Castamon)은 의무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타이러스(Tyrus)가 지대장을 맡은 이상, 

아무 문제 없이 완벽하게 일이 처리되리라 생각했지, 이런 사태가 실제로 일어날 줄은 몰랐어.

하지만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때를 대비해 두긴 했지.

레기움(Regium) 궤도상에 위치한 모든 레이저 방어 네트워크는 

현재 최적의 상태로 재배치되었고, 전부 공허 방어막(Void Shield)으로 완전 차폐된 상태야.

듀으라 우주항(Port Dura)과 살라미스 군락(Salamis Hive)에 위치한 행성 내 방어 병력도 

벌써 재편성과 전투 배치를 끝마쳤어.

외계인 함대 무리는 결코 우리의 대기권 상층부에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자네가 내게 생물학적 대응책을 강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불티스(Vultis)의 가슴에, 그가 처음으로 그 샘플을 잡았을 때의 흥분감이 다시 몰려들었다.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에서 타이라니드(Tyranid)들은 처음 보는 포식 습관을 보였습니다.

또한 승무원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과잉 흥분 증세를 유발했습니다. 

바로 여기 레기움(Regium)의 시민들이 겪는 것과 매우 유사한 증상이었죠.

전 감히 제가 확보한 샘플이 

이 모든 수수께끼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적절한 실험실에서 이 샘플을 연구해 볼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해명하고 싶은 가설을 벌써 몇 가지 세워두었습니다."


"쿠안드(Quand)."


캐스타몬(Castamon)이 의무관의 담당의를 불렀다.


"이 친구 충분히 회복된 게 맞지?"


"그렇습니다, 중대장님."


쿠안드(Quand)가 불티스(Vultis)의 가슴에 박힌 장갑복과의 연결용 소켓을 두드리며 말했다.


"환자의 신경계도 이제 완전 멀쩡합니다.

예전처럼 장갑복을 착용하거나, 진단 도구를 사용하거나, 검사 장비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캐스타몬(Castamon)은 불티스(Vultis)를 관찰하면서 등을 기대고 물었다.


"자네가 가진 이론의 골자가 뭐야?"


불티스(Vultis)는 마음속 깊이 파묻어 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회상했다.


무중력 상태를 유영하는 동안 그의 눈앞을 지나쳤던 살찐 구형 핏덩이들.

서로 부딪치며 무게감 없이 그의 주변을 천천히 떠다니던 시체와 살덩이들.


의무관은 머리를 흔들며 캐스타몬(Castamon)이 서 있는 현실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 그러니까 포식자에 관한 연구를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잠시 혼란스러웠던 불티스(Vultis)의 기분은 훨씬 나아졌다.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을 공격해온 타이라니드(Tyranid)들은 극소수였습니다."


불티스(Vultis)가 자신의 가설을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그 정도 숫자의 타이라니드(Tyranid)는 보통 쉽게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우리가 전에 마주쳤던 전사급 타이라니드(Tyranid Warrior)처럼, 

칼날이 달린 앞발을 가진 성인 크기의 인간형으로, 

방어를 위해 키틴질 외피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장갑복처럼 동족을 입고 있는 공생체를 등에 멘 개체…

그러니까 마치 신경 세포처럼 자신을 위장한 생물이 있었습니다." 


"자네가 가져온 샘플이 바로 그놈인 건가?"


"맞습니다.

전 이 공생체가 일종의 중계기 역할을 한다고 추측합니다.

어쩌면 페로몬 같은 일종의 유인물질을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전 일부 곤충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통제하는 걸 직접 봤습니다,

저는 타이라니드(Tyranid)들이 이걸로 더 많은 동족을 소환하고 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냥감들을 교란하는 어떤 화학물질도 방출한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또한 이 물질은 우리의 통신망을 방해해, 성간 통신을 저해하는 역할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가설은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이 공격받았을 때, 

우리가 서로 명확하게 의사소통할 수 없었던 이유까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범상(凡常)한 일반인들이라지만, 

나름 잘 훈련되고 엄격한 규율을 갖췄던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의 선원과 보안 요원들이

타이라니드(Tyranid) 중계기가 가까이에 출현하자 정말 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모두 자아를 상실한 짐승처럼 행동했지요.

대부분 정신병적 증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일종의 중계기 역할을 하는 그 공생체가 

우리가 겪는 모든 교란 현상의 원흉이라는 건가?"


"현 단계에서는 단순한 추측에 불과합니다."


불티스(Vultis)는 갑자기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몸을 뒤틀며 자세를 바꿨다.


"어디 아프신가요?"


쿠안드(Quand)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


"머리를 좀 비우려고 그런 겁니다.

그게 제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거든요.

강화를 받지 못한 평범한 일반인들만큼 심한 증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불티스(Vultis)는 뭔가를 털어내려는 듯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빈저(Harbinger)를 볼 때마다, 

전 이 생물체가 왜곡계(歪曲界; Warp) 생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 번도 현실에 강생(降生)한 적 없는 자들 중 하나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걸 마주하면 시야가 흐려지고, 온갖 부조리한 증세가 튀어나와 제 정신을 갉아먹는-"


잠자코 있던 캐스타몬(Castamon)이 손을 들어 불티스(Vultis)의 말을 막았다.


"하빈저(Harbinger)? 그게 뭐지?"


불티스(Vultis)는 중대장의 말에

쿠안드(Quand)가 집도한 수술이 잘못되어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심한 혼란에 빠져 머뭇거렸다.


"전…"


잠깐이라지만 불티스(Vultis)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에서 

타이러스(Tyrus) 지대장님을 사냥하던 커다란 외계 생명체가 

바로 그 하빈저(Harbinger)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애당초 그 이름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는데요."


불티스(Vultis)는 자신이 중대장 앞에서 타당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만 늘어놓는 것 같아 내심 괴로웠다.


"사실 그걸 그렇게 부를만한 이유가 딱히 없습니다.

이런 지금 제가 비과학적인 잠꼬대 같은 소리만 늘어놓고 있네요."


캐스타몬(Castamon)은 기이하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 오전, 아바으림(Abarim)이 예지 능력을 사용했을 때,

다른 외계인과는 극히 다른 형상의 무시무시한 형상의 무언가를 보았다고 했다.

그때 사서는 그걸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하빈저(Harbinger)라 불렀어."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전 레기움(Regium)에 돌아온 뒤로, 

사서관(Librarian)인 아바으림(Abarim) 형제와 말을 나눠볼 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이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한 건, 정말로 이번이 처음입니다.

실례지만 사서께서 예지 능력으로 보신 걸 어떻게 묘사하셨는지요?

전 타이라니드(Tyranid) 중에 그렇게 큰 개체는 처음 봤습니다.

아니 사실상 지금까지 제가 봐온 외계 포식자 단일 개체들을 모두 통틀어 봐도 

이 녀석보다 큰 생물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정말 재빠른 개체였지요."


불티스(Vultis)는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의무관의 기억은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이 완벽하게 생생했지만,

왠지 모르게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에서 체험한 사건 자체가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 생물이 이상해 보였던 건 크기와 속도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개체는 흡사 독립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였어요.

분노에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았고,

좀비처럼 정신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정말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전 이 생물체가 같은 종족들과 뭔가 동떨어진 이방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티스(Vultis)는 이 대목부터 오만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에서 전, 

이 녀석이 저를 하나의 객체로 인식하는 걸 분명히 느꼈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절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녀석은 고지식하다고 할 정도로 외골수였어요.

저는 녀석의 뒤를 밟으면서 그 행동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전 이 독특한 개체가 타이러스(Tyrus) 지대장님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죠.

이 친구는 우리에게서 동력을 빼앗고, 무기 체계 전반을 먹통으로 만든 뒤,

지대장님을 다른 병력에게서 격리하고는 조용히 사냥에 나섰습니다.

녀석은 벌써 지대장님이 우리의 지휘관이라는 걸 다 알고 있단 눈치였어요.

결국 이 녀석은 무자비할 정도로 냉혹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지대장님을 살해했습니다."


캐스타몬(Castamon)은 잠시 골똘히 사색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서며 말했다.


"아바으림(Abarim)과 자네가 왜 똑같은 이름을 동시에 언급했는지,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봐야만 쓰겠어. 

일단 자네는 최대한 빨리 샘플에 관한 연구를 마치도록 하게.

뭔가 알아낼 때마다 나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난 이 연구가 현재 우리에게 당면한 최우선 과제라고 보네.

사서관(Librarian) 아바으림(Abarim) 형제에겐,

내가 직접 자넬 찾아가라고 통지해 두지."


불티스(Vultis)는 이동식 침대에서 일어나 중대장에게 절도 있게 경례를 붙였다.

의무관의 인사에 가볍게 답한 캐스타몬(Castamon)은 

문밖으로 나가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에서 소해정으로 탈출할 때,

소해정 안에 탑승했던 사람은 자네와 바으라카(Baraca)뿐이었나?"


"네. 분명 그렇습니다."


"그거참 이상하군.

자네들이 대기권에 진입한 순간부터 해변에 불시착하는 순간까지 

우린 소해정과 그 주변을 정밀하게 추적했네,

그리고 소해정이 비상 착륙한 이후, 

우리 구조대가 자네들에게 달려가는 동안,

우리 추적 장비에 빠르게 내륙으로 이동하는 생명체들이 보였어.

전부 순식간에 숲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추적하진 못했지만 말이야."


캐스타몬(Castamon)은 이 말을 끝으로 병실을 떠났다.


"그레이트 디바워러(Great Devourer)가 예상보다 빠르게 레기움(Regium)에 상륙했군."



*강생(降生) : 신적 존재가 인간으로 태어남.

본문에서는 워프의 존재가 현실에 현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음.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6 장으로


댓글

  1. 레비아탄 박스는 구매안했는데 덕분에 스토리를 알아가네요. 타이라니드 멋진데 모델 좀 더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답글삭제
    답글
    1.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소님의 제작기도 가끔 보고 있는데, 네이버라 댓글을 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린 피규어도 대단한데 발바닥까지 일러스트대로 재현하셔서 놀랐습니다.
      레이너 스태츄는 구매하고 싶을 정도의 퀄리티더군요.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한여름 더위에도 건강 조심하시길 기원합니다.

      삭제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Commissar Raivel 시작

아직 치료중입니다만…

큰 숲의 새순을 보고 나무를 예측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