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Leviathan) 제 4 장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3 장에서…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4 장




레기움(Regium) 행성, 

삼니움 지역(Samnium Province),

자으락스(Zarax)의 요새 도시



캐스타몬(Castamon)은 텅 비다시피한 지휘 벙커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홀로그램 전술 정보 화면 표시기에 유령처럼 떠오르는 정보들을 계속 주시했다. 

타나으로(Tanaro) 병장은 병사들을 준비시키고 도시를 떠날 채비를 마칠 수 있도록 

브리핑에 참석해준 장성들과 보좌관들을 지상으로 안내하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얼마 되지 않는 숫자의 기술 사제들만 남아,

그늘 속에서 논리 기계들이 부드럽게 추론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도문을 읊으면서 유약을 바르며 다독이고 있었다.

사서관(Librarian) 아바으림(Abarim)도 그들 사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서가 느끼는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캐스타몬(Castamon)이 사서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잠시 쉬시는 게?"


아바으림(Abarim)은 캐스타몬(Castamon)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금세 지나갈 통증이요.

타이러스(Tyrus)가 임무를 끝마치면 내 몸 상태는 금방 좋아질 겁니다."


"신호가 너무 약하군요."


캐스타몬(Castamon)이 전술 정보 쪽으로 공개를 돌리며 말했다.


"전술 표지기가 타이러스(Tyrus)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이지요."


아바으림(Abarim)이 신호 수신이 불명확한 관계로 

고작해야 흐릿한 흰색 페인트 자국처럼 보이는 빛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헌데 주변 상황이 이상합니다.

이 주변의 점들은 필시, 호위함들일 텐데 수가 맞지 않아요.

출진하고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분명 숫자가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호위함 중 일부가 그냥 사라져 버렸단 말이지요."


"사라졌다구요?"


캐스타몬(Castamon)은 사서의 옆으로 다가와서, 홀로그램 투영기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바으림(Abarim)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해정은 차치하더라도, 대형 함들의 신호마저 소실되었습니다.

외계인들에게 당한 게 아니라면 분명 신호가 보여야 하는데."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은 아직 크랏수스(Krassus)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아군 함대는 아직 타이라니드(Tyranids)와 조우하지 않았어야 정상입니다."


아바으림(Abarim)은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건,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타이러스(Tyrus)는 벌써 적과 마주친 게 분명합니다."


캐스타몬(Castamon)은 전술 표지기에 표시된 보라색 점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건 근거가 희박한 추측이 아닐까요."


"보십시오, 호위함만 사라진 게 아닙니다.

인커럽티블(Incorruptible)도 지금 좌초되었다고 뜹니다."


아바으림(Abarim)이 홀로그램 전술 정보 화면 표시기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사서의 얼굴 위로 홀로그램의 빛이 가득 차올랐다.

사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는, 깜박이는 형상들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지금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중인 것처럼 보이는군요.

너무 심려치 마시오, 캐스타몬(Castamon) 형제.

공격해온 외계인 함대는 소수로 확인됩니다.

저 배에 얼마나 많은 아군 숙련병이 탑승 중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최고의 전우들이 저기에 있잖습니까.

저 정도의 적이라면 우리 지대(支隊)가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일순간이라지만 이들이 왜 좌초되었다고 표시되는지가 궁금하군요. 

어째서 고작 이 정도 숫자의 적 때문에 진행을 멈춰야만 했던 걸까요?"


현지 작전 상황을 계속 외부 방관자로서 구경만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적인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던 캐스타몬(Castamon)의 인내심은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염색체는 유전적으로 개량되었고, 육체는 수술로 강화되었으며, 

최면을 통한 주입식 교육으로 정신마저 남들보다 우수한 중대장이었지만,

가끔 그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이럴 때 어떤 감정을 느껴왔는지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신력마저 강화된 그였지만,

때론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이 중대장의 정신 방벽을 뚫고 표면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캐스타몬(Castamon)은 마음속에서 이런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강제적으로 이런 감정을 무턱대고 억누르는 대신에, 

그 정서가 부적절한지를 놓고 스스로 평가해 보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항상, 중대장 자신이 보호해야만 하는 대상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아바으림(Abarim)의 말을 듣는 동안,

근본을 알 수 없는 인간적인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고,

이에 캐스타몬(Castamon)은 얽힌 실타래를 풀듯, 

직접 그 원인을 찾아 감정의 골을 풀어볼 요량이었다.


자 그럼, 이번에는 대체 뭐가 문제일까?


캐스타몬(Castamon)에게 두려움을 유발하는 수준은 

강화되지 않은 일반인들을 괴롭게 만드는 정도와는 척도 자체가 달랐다.

예를 들어 중대장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쟁은 그의 존재 목적이요, 

전쟁 수행은 그의 천직이었다.

가치 있는 죽음이라면, 중대장은 언제든 환영할 것이다.


그래, 이거다.


총수(總帥; Lord Commander) 귈리맨(Guilliman)님을 실망시킨다는 생각만으로도

캐스타몬(Castamon)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지부(Chapter)에게 불명예를 안기고 임무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금 그를 괴롭히는 인간적인 감정의 원인은 이거였다.


"레기움(Regium)은 한시라도 무방비 상태에 놓여선 안 됩니다."


캐스타몬(Castamon)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성계(System) 변경에서 예기치 못한 긴 교전에 매달리는 바람에 

우리의 전사들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요.

저들은 지금 여기에 필요한 인재들입니다.

저들의 부재로 말미암아 생크터스 선(Sanctus Line)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어요.

제가 직접 갔었어야 했습니다."


"중대장도 이런 건 예상할 수 없었을게요.

나 역시 이런 일이 생기리라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중대장께서 이번 임무에 파견하신 병력은 

임무에 필요한 숫자보다 훨씬 웃도는 수준의 군사력이고요.

또한 타이러스(Tyrus) 형제라면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손쉽게 털고 일어나 임무를 완수할 겁니다."


"어쨌든 우린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이 왜 좌초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타이러스(Tyrus) 형제와 성간 통신망을 열어주시지요."


아바으림(Abarim)은 중대장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성간 텔레파시 통신(Astrotelepathy)은 아직 불가능합니다.

외계인들이 성계(System) 끝자락에 발을 디딜 때부터 정신감응 자체가 막혀버렸어요.

저 배와 연결을 시도하는 원감사(遠感士; Astropath)들은 

쓸모 있는 것을 원감(遠感)하기도 전에 바로 죽어버릴 겁니다.

원감사(Astropath) 대부분이 벌써 정신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어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위장하고 있었지만, 

사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가 느끼는 통증이 묻어났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내가 끊임없이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린 꼭 지대장에게 소식을 전해야만 합니다."


캐스타몬(Castamon)이 목소리를 높였다.


"원감사(Astropath)가 원감을 할 수 없다면 내가 직접…"


중대장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홀로그램 전술 정보 화면 표시기가 갑자기 껌벅거리더니,

방금 들어온 자료를 토대로 갱신되면서 새로운 전술 정보가 표시되었다.

중대장과 사서는 너무 놀란 나머지, 

혼란에 빠진 채, 새롭게 화면에 표시되는 내용을 못 박힌 듯 서서 바라보았다.


"중앙 정보 처리장치와 연결이 끊겼나?"


캐스타몬(Castamon)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기술 사제에게 물었다.


기술 사제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손을 들어 별들 사이를 거침없이 주파하는 진홍빛 신호를 가리켰다.


"외계인의 함대 신호는 여전히 수신되고 있습니다, 중대장님.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들은 이제 레기움(Regium)으로 진로를 수정한 상태입니다."


"그럼, 우리 함선들은 어디 있는가?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은 대체 어디에?"


그녀는 차마 중대장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저… 중대장님, 

신호가 불분명해 정확한 건 아닙니다만, 말씀하신 함선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외람되오나 완파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불가능해."


캐스타몬(Castamon)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바으림(Abarim).

천리안(Warpsight)에 뭔가 보이는 게 있습니까?"


아바으림(Abarim)은 중대장의 다급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사서는 앞으로 고꾸라지다시피 넘어지다가, 

간신히 정보 종합 상황실의 기계 중 하나에 몸을 기댔다.

눈을 질끈 감은 사서는 반대편 손으로 이마를 동여매듯 감싸고 있었다.

피가 눈꺼풀 사이로 배어 나오면서, 

검붉은 액체가 생생하게 사서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서의 장갑복 표면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사파이어 색깔로 불타올랐다.

청색광이 점차 뚜렷해지면서 사서의 경련도 점차 심해졌다.


"형제여."


캐스타몬(Castamon)이 몸을 떠는 사서의 장갑복 어깨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아바으림(Abarim)이 눈을 떴다.

사서의 눈동자가 있어야 할 부분에는 진홍빛 구체가 떠 있었다.


"캐스타몬(Castamon), 나는 보았소."


눈을 뜬 사서의 목소리는 합성된 음성처럼 기이할 정도로 단조로웠다.





"하빈저(Harb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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