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Leviathan) 제 6 장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5 장에서…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6 장




레기움(Regium) 행성, 

삼니움 지역(Samnium Province),

자으락스(Zarax)의 요새 도시



사서관(Librarian) 아바으림(Abarim) 형제는 

불티스(Vultis)의 연구실 정문에 잠시 멈춰서서, 문틀에 몸을 기대고 쉬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물끄러미 방 안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사서는 현실 세계의 물질 사이로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물에 풀어둔 물감처럼 서로 얽히고 섞이면서 제멋대로 다양한 모양새를 자아냈다.

사서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무수한 손톱과 발톱이 나타나, 

현실 세계를 찢어발기거나 물어뜯고 있었다.

이 난잡한 죽음의 잔치 배후에는 유혈 사태를 조장하는 터무니 없이 거대한 거인이 있었다.

하빈저(Harbinger)는 깊게 박힌 돌덩이처럼 그의 생각 속에 아예 뿌리를 내렸다.

그 괴수는 마치 사서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서 함께 해온 듯이 자리를 잡고서는,

사서의 삶 속에서 늘 같이 존재해온 존재인 것처럼 정신에 꽉 박혀있었다.

물론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빈저(Harbinger)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뇌수에 깊이 꽂힌 이 괴수는 

평소라면 사서가 손바닥 뒤집듯 쉽사리 행할 수 있는 초능력의 운영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사서는 포스 액스(Force Axe)를 움켜쥐고 보호의 기도문을 읊조렸다.

그러자 강렬한 힘을 지닌 기도문의 음절 하나하나가 자기 혈관을 타고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힘들건 안 힘들건 간에, 사서는 자신이 훈련받은 대로 일을 처리할 셈이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사서는 연구실을 다시 둘러보았다.


연구실은 거대한 하나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방의 중심부를 빙 두른 벽에는 각 면마다 놀라운 수집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발코니가 서 있었다.

벽 구석구석마다 서류보관함이나 저장소, 그리고 선반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다양한 종족들의 여러 신체 부위가 그 안에 한 치의 틈도 없이 차곡차곡 가득 차 있었다.


몸통에서 적출된 수천 개의 사지,

가능한 한 원래 모습을 유지하도록 철사를 박아 넣은 날개,

방부 처리가 된 무언가의 대가리,

약품에 절인 각종 장기,

미라처럼 바짝 건조한 시체,

천천히 부패해 가는 동물의 외피,

그리고 심술궂은 눈초리를 가진 두개골까지,

마경같은 광경이 펼쳐진 방 안은 흡사 기괴한 박람회라도 열린 듯한 모습이었다.

몇몇 표본들은 인체와 흡사한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인간과 매우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불티스(Vultis)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전역(戰域)에서 개인적으로 수집해온 외계 포식자들로 

너무나 이질적인 생태구조를 지니고 있어 아직 분류조차 하지 못한 존재가 태반이었다.


두터운 전력 케이블이 연결된 연구실 천장 조명은 방 안을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는데,

노출된 방식의 조명 장치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은 

방 안에 안치된 각종 표본의 발톱이나 튀어나온 부분, 

혹은 유생체(幼生體)에게 걸려있는 이름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황변 현상으로 누렇게 변색 중인 이름표에 휘갈겨 쓰인 필기체 글자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연구소 내에 존재하는 꼬리표의 숫자는 외계 생명체의 신체 표본 숫자보다 많았다.

수천 장의 딱지는 작지만, 저마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모든 이름표는 불티스(Vultis)의 세밀하고 깔끔한 손 글씨로 작성되어 있었다.

연구보조원(Helot)들은 표본 주위를 분주하게 오가면서 꼬리표에 적힌 글을 하나씩 필사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연산 장치(Cogitator)에게 입력하고 있었다.


물론 아바으림(Abarim)은 

불티스(Vultis)가 기계를 상용하는 대신, 

신군(神軍; Adeptus Astartes)의 일원이 가진 기본 소양,

즉, 영민한 기억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종복(從僕; Servitor)들은 수집품들 사이를 느릿느릿 이동하며, 보관 통에 화합물을 붓거나, 

표본들이 상하지 않게 수지를 묻힌 붓으로 조심스럽게 경화 작업을 수행했다.

종복(Servitor)은 기본적으로 단순 작업만 수행할 수 있는 좀비와 같은 존재로

불티스(Vultis)의 연구실에 소속된 종복(Servitor)들은 다리를 휠체어처럼 바퀴 달린 기계로 대체했고, 

눈은 깜박이지 않아도 되는 초점 조절이 가능한 망원 렌즈로 교체된 상태였다.


지금, 연구소 안에는 

쓸데없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입이 꿰매진 종복(Servitor)들과 불티스(Vultis)만이 남아있었다.

의무관(Apothecary)은 연구소 일 층에 내려와서,

강철 골격 구조체 위에 테라리엄처럼 보이는 투명한 구체들이 줄지어 늘어선 표본대 바로 옆,

작업대 위로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는 뭔가에 열중해 있었다.


표본대 위의 투명한 구체들 안에는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들어있었는데,

불티스(Vultis)가 작업하는 동안, 

그곳에 갇힌 다양한 파충류와 설치류들이 자신을 포획한 자에게 다가가고자, 

자신들의 감옥을 물어뜯고 할퀴는 등 난리였지만,

집중한 불티스(Vultis)는 이들의 노력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견 초조해 보이는 모습으로 양피지 더미를 뒤지고, 정보 단말기를 두르려 대는 의무관은

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방문객이 왔다는 것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바으림(Abarim)은 시야에서 환상체를 몰아냈다.

그러자 마침내 비현실과 거리를 두고 돌아온 진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며 사서를 비웃던 왜곡계(Warp) 괴물들이 

어느새 죽어있는 시체와 뼛조각 표본으로 변해 조용히 누워있었다.

사서는 수년 전, 직렬 전문 후반기 교육을 통해 

현실의 얇은 장막 뒤에 놓인 광기를 현실과 분리해 마음 한편으로 격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최근 몇 주간, 예전엔 숨을 쉬는 것처럼 할 수 있었던 이 행동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아바으림(Abarim)은 레기움(Regium)에 거주하는 모든 생션드 텔레패스(Sanctioned Telepaths)들이

지금 자신이 싸우고 있는 것과 똑같은 환영에게 사로잡혀,

매 순간 위험한 정신 붕괴의 나락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현실에 잡아둬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 어깨를 짓누르는 바람에

사서는 쉴 새 없이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런데 간신히 참아왔던 고통과 억눌러 온 환각이 연구소에 들어온 순간 더욱 심해진 것이다.


"대체 어째서 이렇게 된 건가?"


아바으림(Abarim)이 투덜거렸다.

연구소 전체에 메아리칠 정도로 사서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바람에 

불티스(Vultis)는 깜짝 놀라 작업대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 사서를 바라보았다.

헬멧을 쓰지 않은 의무관은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의 얼굴을 본 사서는 안도감이 들었다.

의무관이 가져온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사서는 약간이라도 주의를 돌릴 일이 생긴 데에 감사했다.


고통을 숨긴 아바으림(Abarim)은 몸을 곧추세우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계단을 내려와 전우에게 다가갔다.


마주 선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움켜쥐었다.


"자네가 멀쩡히 걸어 다니는 모습을 다시 보니 정말 좋군."


아바으림(Abarim)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보여 다행이네, 루코(Luco)."


"사서님은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입니다."


격식 따윈 저 멀리 날려버린 듯한 거침없는 불티스(Vultis)의 말에, 

아바으림(Abarim)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고야 말았다.


"무엇 때문에 이리 힘들어하십니까, 사서님?"


의무관은 걱정스레 말을 이었다.


"어디 다치시기라도 하셨습니까?"


아바으림(Abarim)은 고개를 저었다.


"다친 데는 없네.

최소한 육체적으로는 아주 멀쩡하지.

지금 우리를 괴롭혀 대는 정신 신경증, 

그러니까 범우주적 광기가 내게도 영향을 미쳐서 그렇네.

시민들을 폭력으로 강제로 내몰고 있는 그놈이 내 의식마저 강제로 점거하고 있어서야."


"하빈저(Harbinger) 말씀이십니까."


불티스(Vultis)가 예리한 눈매를 번득이며 말했다.


"그렇네, 하빈저(Harbinger).

아마도 그것 때문이야.

캐스타몬(Castamon)이 말하길 자네도 똑같은 용어를 썼다던데.

여기 대중들도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같은 단어를 쓰고 있어."


불티스(Vultis)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건 단순한 우연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불티스(Vultis)가 작업대에서 연구 노트를 뒤지는 동안, 

아바으림(Abarim)은 조용히 의무관을 살폈다.

사실 지부(Chapter) 내에서도 불티스(Vultis)를 꺼리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의무관을 신용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그의 성격을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불티스(Vultis)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전우들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발랄한 유머 감각과 뜨거운 동지애가 아예 없었다.

기이하다고 느낄 정도로 괴팍하고 강박적인 성격을 가진 의무관은

타인과 농담을 나누기보다 생물학적 분석 자료를 참조하길 더 좋아했고, 

언제나 일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몰랐다. 


그러나 아바으림(Abarim)은 의무관의 그런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기 일과 그에 필요한 기술에 대한 의무관의 헌신적인 노력은 

타의 귀감이라 칭송받아 마땅할 정도였다.


그리고 사서실(Librarius)의 일원인 아바으림(Abarim)은 

집단에서 조금 특이하다고 외부자 취급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이거 왠지 익숙해 보이시지 않으십니까?"


불티스(Vultis)가 책을 하나 들이밀더니,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물었다.


아바으림(Abarim)은 의무관이 가리킨 그림을 자세히 훑었다.

그건 어떤 타이라니드(Tyranid)를 그린 그림이었다.

크로키처럼 대상의 형태만 빠르게 그린 스케치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그 괴수의 형태와 너무나 똑같았다.

하빈저(Harbinger)가 종이에 그려진 모습을 보자 사서는 뭔가 거북해졌다.

이건 마치 누군가 자신의 꿈 안으로 들어와 악몽 속의 존재를 밖으로 끌어내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맞네."


사서가 맞장구를 쳤다.


"바로, 이 생물이야.

이 생명체가 어두운 먹구름처럼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떠나지를 않네."


불티스(Vultis)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는 후술한 내용에 이 생명체를 가리켜 『노른-에미서리(Norn-Emissary)』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일종의 사절이나 화신(化身)이라고 주장하더군요.

글쓴이는 게재 당시부터 글의 진위를 의심받다가 학자로서의 신뢰도가 바닥을 쳤고,

이후의 기록에 따르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고 쓰여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게 하빈저(Harbinger)라 확신합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에 대한 자네의 추측은 뭔가?"


아바으림(Abarim)이 물었다.


"왜 우리가 정신세계에서 이 생명체를 마주하는 거지?"


불티스(Vultis)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모든 것이 아직 이론에 불과합니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사실이라 여겨왔던 것들을 상당히 벗어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레기움(Regium)의 모든 정신적 이상 증세들은 

타이라니드(Tyranid)가 우리 성계(System)를 가로지르는 것과 분명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서님과 제가 어떻게 동시에 같은 환영을 볼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면밀히 따져보자면, 

사실 저들이 여기에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묵묵히 의무관의 말을 경청하던 아바으림(Abarim)의 눈에 긴 의자 한켠에 놓여있는 상자가 보였다.

일종의 장식 상자처럼 보이는 그것은 한쪽 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자네가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에서 가져온 샘플인가?"


"그렇습니다.

제겐 다소 생소한 종이었지만,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 조금 더 알아보니,

몇 년 전에 다른 외계 생물학자분이 

저보다 먼저 이 친구를 발견해 신종 외계 생물체로 등재해두셨습니다.

그분은 이 생물체를 『뉴로건트(Neurogaunt)』라고 명명하셨습니다.

그 외계 생물학자께서 이 생물의 숙주를 지칭하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이신 건지,

아니면 제가 채집해온 기생체를 가리켜 그렇게 말했는지,

혹은 두 공생체를 하나의 존재로 생각해 명칭하셨는 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분의 연구 결과는 대부분 소실되었거든요.

제가 얻은 거라곤 뉴로건트(Neurogaunt)라는 이름과 극소수의 단발성 자료뿐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불티스(Vultis)는 바로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더 건강했었는데 말입니다.

숙주를 모방한 서스펜션 구조에 안착시키면 생기를 되찾을 거라 예상했지만,

버티질 못해 샘플의 외골격이 점차 용해되는 상황입니다.

안정시키려면 기생할 숙주가 필요한가 봅니다."


의무관이 표본 통 아래의 조작판을 조작하자,

집게들이 움직이더니, 샘플이 올라앉은 서스펜션 틈으로 들어가 샘플을 구속했다.

먹물을 탄 것처럼 거무튀튀한 액체 안에서 반짝이는 금속 바늘의 움직임은 유난히 눈에 잘 띄었다.

금속 바늘은 타이라니드(Tyranid)의 껍질을 뚫고 박히더니 뭔가를 주입했다.


이런 상황에 놓였음에도 샘플은 조금씩 성장했다.

표본 통 안으로 파고들 기세로 넋을 잃고 바라보는 불티스(Vultis)의 얼굴은

투명한 유리에 거의 닿을락 말락 한 위치까지 다가가 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샘플을 바라보던 의무관은 갑자기 큰 한숨을 쉬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표본 통 안의 샘플은 뭐가 불편한지 연신 꿈틀대고 있었다.


그동안 이제 좀 적응할만하다고 느꼈던 아바으림(Abarim)의 두통이 갑자기 더 심해졌다.

사서가 불티스(Vultis)에게 다가가자 자기 머리에 불이 붙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떤 결과를 관측할 수 있으리라 예측했었나?"


불티스(Vultis)는 짙은 검은색 눈동자에 비통한 심정을 가득 담은 채로 사서를 바라보았다.


"제가 인커럽티블(Incorruptible)에서 직접 봤던 현상을 재현하려 했습니다.

생체 공학으로 재조합한 호르몬을 강제로 주입해 위험한 상황이라 인지시키고, 

그에 따른 비상 반응이 유발되길 기대했지요.

제 가설 중 하나는 

이 기생충이 무언가의 명령을 중계하는 중계자로서, 

수신된 명령에 따라 어떤 종류의 페로몬을 발산함으로써, 

주위의 다른 생명체들을 조작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생물이 발신하는 생체 신호를 모방할 수만 있다면,

신호 중계를 방해하거나 아예 막아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유사한 신호를 발신하거나 신호를 끊어버리는 무기를 개발해서 

타이라니드(Tyranid) 지휘관이 현장에서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합해 본 물질들은 전부 동일한 반응을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지휘관?"


정신을 차리기 힘든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아바으림(Abarim)은 의무관의 아이디어가 기발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라니드(Tyranid)는 먹이를 찾아 떼로 몰려다니는 야생 동물이네, 루코(Luco).

전략적인 모습은커녕 이성적인 모습조차 보인 적이 없어.

그들에겐 전술도 없고, 지도자도 없지."


"타이라니드(Tyranid)에게도 분명 지휘관이 있습니다.

또한 전술적 사고와 전략적 행동도 하고요.

과거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다른 세계에서 그들과 벌였던 교전을 되짚어 보세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적이 분명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들은 확실히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의무관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득 메운 다른 표본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이들의 행동이 

먹이에 집착하는 단순한 짐승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타이라니드(Tyranid)는 끝없이 변화하는 종족입니다.

이들의 생태는 꼭 바이러스 같아요.

새로운 도전을 마주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매번 새롭게 변화하면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는 바이러스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은하에 적응하려 하고 있지요."


의무관은 고갯짓으로 그의 앞에 있는 공생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새로운 진화의 산물인 이 독특한 개체는

아마도 하위 개체들을 통솔하도록 만들어진 기생체일 겁니다."


아바으림(Abarim)은 다시 한번 샘플을 자세히 보려 했지만,

기생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자,

어쩔 수 없이 불티스(Vultis)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사실이라 치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나?"


사서의 질문에 불티스(Vultis)는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의무관은 타자기를 두드리듯이 손가락으로 양피지 위를 두들겼다. 


"타이라니드(Tyranid)는 무언가를 공격할 때,

미리 짜여진 형태의 공격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습성을 보입니다.

이들의 생태 중에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이해하는 부분이죠.

지금까지의 공격을 분석해 보면, 

이들은 단계적으로 나눠진 독특한 침공 방식에 따라 공격에 임합니다.

우리가 이 기생체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고 명령을 내리는지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이를 이용해 전투 도중 이들의 신호를 교란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시계 톱니처럼 잘 맞물린 놈들의 연속적 공격 방식이 어지럽혀질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기계처럼 무자비한 효율성을 보였던 이들의 대열이 와해되겠죠."


"하지만 자네가 실험한 화합물 중에 효과를 보인 건 없다면서."


사서의 말에 불티스(Vultis)의 눈에서 번득이던 열정의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모두 실패였습니다. 

수십 가지 페로몬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작은 반응조차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입니다."


아바으림(Abarim)은 타이라니드(Tyranid)를 자세히 보기 위해 다시 몸을 구부렸다.

사서가 무심코 샘플에게 몸을 다가간 순간,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도끼로 내려치는 듯한 두통이 엄습하자, 

사서는 휘청이며 뒤로 물러서다가 작업대에 부딪히는 바람에 자칫하면 넘어질 뻔했다.

그 바람에 작업대에서 수술 도구들과 각종 실험기구들이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실험실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겨우 자세를 다잡고 정신을 차린 사서는

불티스(Vultis)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영적인 힘.

그게 갑자기 급증하는 바람에 그러네."


아바으림(Abarim)은 다시 표본 통 쪽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서는 사서의 머릿속에서, 

뭔가 밝게 빛나는 불꽃이 확 일어나는 느낌이 들더니,

사서의 두통이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표본이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 겁니까?"


불티스(Vultis)의 눈에는 먹이를 눈앞에 둔 포식자의 그것처럼 광채가 어렸다.

아바으림(Abarim)은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강력한 초능력자에게 다가서는 느낌이군."


"어쩌면 초능력 중계기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불티스(Vultis)는 연구 노트를 두드리며 말했다.


"뉴로건트(Neurogaunt).

어쩌면 제가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접근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공생체들은 화합물이 아니라 정신감응을 이용했던 것일 수도 있겠는데요.

일종의 초능력자같이 기능했던 겁니다.

흠, 이걸 입증하려면 다른 샘플이 필요하겠네요.

똑같은 두 개의 기생체를 두고 실험해야지만, 제 가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체들이 서로 어떻게 소통하는 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어요."


의무관은 아바으림(Abarim)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전에 캐스타몬(Castamon) 중대장께서, 

제가 불시착한 장소에서 외계인들이 도주하는 장면을 보셨다고 하셨는데,

그들의 위치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까?"


아바으림(Abarim)은 고개를 저었다.


"워낙 숫자도 적었던 데다가 이미 숲속으로 깊숙이 숨어버렸네.

인제 와서 놈들을 숲에서 색출하려면, 어림잡아도 최소 몇 주는 걸릴 거야.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요새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겠지.

중대장님도 이미 이 문제를 놓고 타나으로(Tanaro) 병장과 상의해 보셨지만,

비슷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바람에 일단 방치하는 쪽으로 결론을 보았다지 아마."


불티스(Vultis)는 작업대 옆을 서성거리다가 말했다.


"몇 주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의무관은 그에게 달려들려고 몸부림치는 타이라니드(Tyranid)를 바라보며 단언했다.


"제가 사냥대를 직접 지휘한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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