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Leviathan) 제 2 장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1 장에서…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2 장





레기움(Regium) 행성, 

삼니움 지역(Samnium Province),

자으락스(Zarax)의 요새 도시



사람들은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 장식을 진흙투성이로 만들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르노스(Carnus) 도서관으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고즈넉했던 육각형 중앙홀에 몰려든 백여 명의 사람들이 

각자 빠르고 낮은 목소리로 재잘대는 통에 

소음은 점점 증폭되어 마치 이곳이 도서관이 아니라 원래 음악당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중앙홀 안쪽은 웅성거리는 불협화음이 한창이었다.

다채로운 화려한 옷차림과 다양한 발음, 그리고 말투가 섞여 혼란스러웠지만,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공포.


몸을 잔뜩 옹송그리며 저마다 작은 무리를 지은 사람들은 

주변에 경계하는 시선을 던지며 제각각 뭔가를 급하게 숙덕였다.

무리의 구성이 많아질수록, 대화에는 더욱 가열한 광기가 묻어났으며,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가 열병처럼 퍼졌다.


세으록(Seroc) 총독은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한 참 위,

계단식 좌석 최상단에 위치한 의자들 사이에서도 더욱 앞으로 돌출되어 나온 발코니석에 자리했다.

총독의 자리는 중앙홀의 돔형 지붕 꼭대기와 너무 가까웠기에

총독은 황제 폐하의 후광으로 보존된 인류 문명의 작은 메아리이자,

띠처럼 중앙홀 돔 주변을 감싸고 있는 예술 작품의 멋들어진 붓놀림을 실시간으로 직관할 수 있었다.

총독은 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 잊어버리려는 듯이

허공으로 손을 뻗어 작품 주위를 감싸고 있는 금박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보는 중이었다.


하인과 보좌관들에게 둘러싸인 총독의 뒤로,

머리 위에 그려진 성도들이 무색해 보일 정도로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소수의 성직자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총독에게도 지금 그의 앞에 펼쳐진 화려한 부의 향연은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세으록(Seroc) 총독은 대충 헤아려 봐도,

저들이 잡다하게 달고 있는 장신구 중 하나만 팔면

자신의 군락(Hive) 인구 절반을 공짜로 먹여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런 가정이 총독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총독은 대장상(Senior priest)에게 몸을 돌렸다.


"증거자(證據者; Confessor) 투르가우(Thurgau).

부총독이 도착한 이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시던데.

아직 그대의 분노가 성스러운 신성 개입을 불러오지는 못하나 봅니다."


총독의 말이 재치 있는 농담이라도 되는 듯이 증거자(Confessor)는 만면에 매력적인 미소를 띠더니,

서재를 가득 메운 암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쾌활하게 웃었다.


"벨라 잘츠(Vela Zalth) 여사는 당신의 할머니뻘이 됨직한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신의 교리를 받아들였다고 하던데 말이오."


세으록(Seroc) 총독이 말을 이었다.


"당신의 믿음이 이제 그녀의 믿음이고, 그녀의 사원은 이제 당신의 사원이 되었소.

완벽한 성취로 당신의 성무를 끝마치셨구려."


투르가우(Thurgau)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그의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화려한 홀(笏)을 쥔 손을 느슨하게 풀고 무릎 위에 얹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성무에는 끝이 없습니다."


세으록(Seroc) 총독은 젊은 성직자를 가늠해 보았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증거자(Confessor)의 피부는 

너무나 창백해서 얼핏 보면 투명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불면 날아갈 듯 쥐면 꺼질 듯한 그의 외모와 달리 그의 내실은 영 딴판이었다.

레기움(Regium)에 도착한 바로 그날부터 성무에 착수한 투르가우(Thurgau)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 치 혀만으로 

지난 수 세기 동안 지역민들이 철석같이 믿고 살아온 믿음을 꺾고, 

그걸 전파하던 지역 사제들마저 모조리 감화시켰다.


총독은 대관절 무엇이 자신과 대화하고 있는 증거자(Confessor)의 눈길을 끌고 있는지가 궁금하여, 

그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당신도 공민들이 종교적인 의미로 자해하는 것을 막진 못할 것이요.

아무리 당신이 신중하게 성무를 집행한다고 할지라도 말이오."


총독은 다시금 중앙홀에 모인 군중들을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어떤 이는 금속이나 나무를 피부에 박아넣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피부에 구멍을 뚫기도 했지.

하나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소?"


"세으록(Seroc) 총독님 문제가 됩니다."


투르가우(Thurgau)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끈하긴 했지만, 평소처럼 완전히 부드럽지는 않았다.


"저들은 자신들의 피부밑에 씨앗을 심습니다.

게다가 신황(神皇) 폐하의 피를 생기가 가득한 액즙쯤으로 여기고 있어요.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중대한 문제입니다.

작은 일탈은 곧 거대한 타락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입니다.

고로 이는 불경스러운 신성모독이며, 

위험한 짓거리입니다."


세으록(Seroc) 총독은 화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한가하게 사사국(寺社局; Adeptus Ministorum) 고위 성직자와 교리문답이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다시 군중들을 내려다보는 총독의 눈에

투르가우(Thurgau)가 질색하는 레기움(Regium)의 구습에 따라 

복잡하게 얽힌 피어싱들이 피부에 가득한 젊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던 벨라 잘츠(Vela Zalth)가 보였다.

부총독의 시선 역시 총독을 향하고 있었다.

그 옆에 구습을 따라 피어싱을 주렁주렁 단 자는 

부총독의 정신적 계승자이자 실질적인 후임인 집정관(Consul) 다마리스(Damaris)였다.

두 여성은 다마리스(Damaris)는 총독과 투르가우(Thurgau)에게 살짝 머리를 숙인 뒤,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처럼 서로 헤어졌다.



벨라 잘츠(Vela Zalth)는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지팡이로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부총독은 중앙홀 한가운데 솟아있는 작은 연단 위로 올라가면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쓸데없는 농담을 던졌다.


"왜 모든 곳에 계단이 필요한 걸까요?

그냥 평평하게 만들면 탈이라도 난답니까?"


다마리스(Damaris)는 나이가 지긋한 치안판사 우르준(Urzun)이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는 동안에도 

연단 아래에 서서 벽에 가득히 늘어선 책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벨라(Vela)와 동년배인 우르준(Urzun)이 

손녀뻘은 되어 보이는 앳된 여성들을 음흉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토할 것 같았다.

헝클어진 백발 아래 퀭한 눈구멍 사이로 엉큼한 눈을 가늘게 뜬 치안판사는 

그녀의 눈엔 말 그대로 비루함의 대명사처럼 보였다.


"그들이 우리의 노래를 전부 여기에 가둬버렸어요,"


다마리스(Damaris)가 책을 두드리며 말하자, 

우르준(Urzun)은 과장된 표정으로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그런 행위가 매우 불쾌한 짓이었다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는 의견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대체 누가 그랬나요?"


벨라(Vela)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우리 행성 밖에서 온 외지인들이요.

그들은 기록 출판이라는 이름으로 필경사들을 시켜,

구전으로 전해 오던 우리의 노래들을 이 책들에 가둬버렸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알고 있지만 결코 소리를 내어 부를 수 없는 그 노래들 말입니다.

저들은 우리의 입에서 우리의 노래를 빼앗아 가서는 

보존이라는 명목하에 이 책들 사이에 우리의 노래를 박제해 버렸습니다."


"놈들은 우릴 전시관 구경거리로 전락시켰어."


우르준(Urzun)이 슬그머니 다마리스(Damaris)의 팔을 꽉 쥐어짜며 외쳤다.


오늘따라 벨라(Vela)는 온몸이 아팠다.

관절 하나하나부터 폐까지, 안 아픈 부분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점차 가늘어지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 아래 두피까지 통증에 시달렸다.

부총독은 늘 다마리스(Damaris)의 사랑스러운 열정을 귀여워했지만,

오늘은 느긋하게 연극에 몰두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음흉한 우르준(Urzun)이 

자신의 앞에서 다마리스(Damaris)에게 슬쩍 수작질하는 꼬락서니도 거슬렸다.

그러다 보니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린 지금 살아있지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외지인들 덕택입니다.

울트라마린(Ultramarine)들이 레기움(Regium)에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노래 몇 개쯤은 쉬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다마리스(Damaris)는 벨라(Vela)를 쏘아보았다.


"우리의 노래들을 훔쳐 간 외지인들을 용서해 주실 수 있다니 정말 넓디넓은 아량을 가지셨군요.

하면 그 넓은 도량으로 놈들이 우리에게 자행한 다른 짓도 용서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우리의 성지를 더럽히고 앗아간 악의에 가득 찬 놈들의 짓거리를 용서하실 수 있나요?

저들은 왜 살라미스 군락(Salamis Hive)에 요새를 세우지 않았죠?

이왕 요새를 세울 거면 거기 세우는 게 더 합리적이잖아요.

하지만 증거자(Confessor) 투르가우(Thurgau)는 여기에 요새를 세우자고 강권했죠.

저 추한 요새를 세우겠다며 아우레우스 나홀(Aureus Nahor)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야만 했습니까?

대륙에서 가장 큰 성스러운 사원을 꼭 부숴야만 했습니까.

아우레우스 나홀(Aureus Nahor)이 봄에 보여주었던 정경을 기억하시나요?

불타오르는 듯이 반짝반짝 빛나던 그 아름다운 나뭇잎들.

외지인들은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고 이걸 차가운 기계로 밀어버렸어요."


우르준(Urzun)은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마리스(Damaris)의 팔을 또 잡아챘다.


"내 귀엔 아직도, 무참히 파헤쳐진 사원의 돌무더기에 깔려 울부짖던 뿌리의 비명이 들려."


벨라(Vela)는 그들의 주장에 짜증이 난다는 듯, 윽박질렀다.

행성 밖에서 온 외지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오랜 기간 숭배해온 『나무』의 본질을 포함하여

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한 진실을 여럿 가져와 강요해왔다.


"뿌리 따위는 없어요.

실존하지 않죠.

실제로 뿌리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예 존재한 적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싫어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에서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무심하게 이성적인 듯한 발언을 계속하던 벨라(Vela)는 

외지인들이 앗아간 소중했던 것들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방식을 계속 받아들여야만 하구요.'


다마리스(Damaris)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뿌리는 바로 저기에 있어요.

우리 모두가 목도했습니다."


"우리의 조상은 모두 그들 사이에 매장되어 있어,"


우르준(Urzun)이 다마리스(Damaris)를 여념 없이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그건 기계예요."


벨라(Vela)가 일갈했다.


"모두 만들어진 기계입니다.

외지인들이 우리에게 그 증거를 보여준 것처럼 말이죠."



우르준(Urzun)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는 다마리스(Damaris)를 계속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드디어 연단의 계단 끝에 도달한 순간, 

벨라(Vela)는 그만 지팡이로 다른 사람의 다리를 찌르고 말았다.


"드디어 꼭대기네요.

누군가가 나에게 계단을 더 올라야 한다고 말할 거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발언에 목숨을 걸어야 할게요."


벨라(Vela)는 다마리스(Damaris)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분들 모두, 

투르가우(Thurgau)가 왜 굳이 이곳에 요새를 세우기를 원했는지를 알고 있죠.

이건 우리를 향한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겁니다.

이제 우리는 저들이 신황(God-Emperor)이라 부르는 신앙을 섬겨야만 합니다.

한데 아우레우스 나홀(Aureus Nahor)이 남아있고, 사람들에게 계속 숭배받으며, 

신자들이 거기에 지속적으로 기도를 바친다면, 황제교의 신앙 전파가 매우 어려워지겠죠.

신학 토론 따위는 얼마든지 응해드리겠지만, 

궁극적으로 신황 폐하(God-Emperor)는 우리가 믿던 신앙의 신과 같은 분입니다, 다마리스(Damaris).

그러니 우리는 현 상황에 적응해야만 합니다.

좀 더 시야를 넓혀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구습에 얽매여 적응하기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상상해 보세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만약 그랬다면 우리 시민들은 노래보다 더한 걸 잃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린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지요."


"수천 년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경석콘크리트(Rockcrete) 바닥에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제겐 전혀 행운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데요.

기껏 살아남았다지만, 우리가 생존은 저들이-"


중앙홀로 쇄도하는 병사들 때문에 다마리스(Damaris)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병사들이 사람들을 연단에서 멀찍이 떨어뜨리기 위해 강제로 뒤로 물러서도록 강요하자,

군중들 사이 여기저기서 야유와 불평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꺼운 방탄복을 입고 완전 무장을 갖춘 각이 잡힌 군인들이 

당장에라도 발포할 듯이 무기를 휘두르며, 

턱을 한껏 들어 올리곤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투가 벼려낸 병사들의 칙칙한 녹색 제복은 사람들의 화려한 의상과 뚜렷한 대비를 이뤘다.


군인들이 입은 방탄복 위, 방탄 플레이트에 난 흠집과 얼룩은  

그 어떤 무기보다 귀족들을 양 떼처럼 한쪽으로 몰아가는 데 유용했다.


"감히 이런 몰상식한 폭거를 벌이다니, 저주 받을 지어다."


벨라(Vela)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두 명의 케이디아(Cadia) 장교들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의 오만한 꼬락서니를 보라지.

마치 자신이 신과 같은 권력을 받았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군.

너희에겐 그럴 권한이 없어.

너희는 캐스타몬(Castamon)이 아니야.

너희는 신군(神軍; Adeptus Astartes)이 아니라구.

너희는 그저 무장한 일반인일 뿐이야.

우리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젠체하며 나대는 꼬라지 좀 봐.

저 계집이 가장 악독한 년이야.

저 대위 년.

스스로 우리를 이단자들로부터 지켜줬다고 자위한다지."


우르준(Urzun)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비난했다.


"얄팍한 권력에 취해, 

자기 모성이 위험에 처해 도움을 청하는 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무시했다더군,

악마 놈들 손아귀에 자기 고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꼼짝도 안 했다며."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대위에게 집중되었다.

대위는 자기 부관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의식용 나팔을 허리띠에 끼운 그녀의 부관은 큰 키에 다소 거만해 보였다. 

카르포바 대위(Captain Karpova)는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여성이었다. 


부관에게 명령을 전부 내린 대위는 

눌러 쓴 군모 챙 사이로 번득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군중을 당당하게 노려보았다.

분노로 일렁이는 그녀의 한쪽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색이었고,

예전에 없어진 다른 쪽 눈이 있던 자리에는 목표 추적 시스템이 내장된 의안이 자리했다.

그녀의 얼굴은 말라붙어 갈라진 황무지처럼 상처투성이였고, 

가혹한 상처들 때문에 얼굴만으로 그녀의 나이를 정확히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녀의 실제 나이는 부관보다 훨씬 젊었다.


"인두겁을 쓰고 사람이 그럴 수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다마리스(Damaris)는 대위의 단호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벨라(Vela)도 툴툴거리며 불평하고 있었지만, 

섣불리 저항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카르포바(Karpova) 대위는 자신을 얼빠진 듯이 바라보는 집정관의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그냥 무시하고는 겁에 질린 군중을 쓱 둘러보고, 계단식 좌석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발코니석에 앉아 있는 세으록(Seroc) 총독이 보였다.

총독은 건장한 체격을 가진 수염 난 사내로 무엇보다 자의식이 상당히 강해 보였다.

대위는 총독을 보자마자 경례를 붙였고, 그가 답례로 살짝 목례하자 만족했다.

그리고 총독의 옆에서 말 상대를 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고는 더욱 보람찼다.


대위는 증거자(Confessor) 투르가우(Thurgau)를 잘 알고 있었다.

캐스타몬(Castamon)이 레기움(Regium)에 도착하고 불과 몇 달 뒤,

그녀는 투르가우(Thurgau)와 함께 이곳으로 배치되었다.

투르가우(Thurgau)와의 대화는 

그녀가 레기움(Regium)으로 발령 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기쁨 중의 하나였다.

증거자(Confessor)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실로 본보기라 할 수 있었고,

가끔 흔들릴 뻔한 그녀의 믿음도 다시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볼라드 병장(Sergeant Vollard),"


대위는 가까이에 있는 부관을 지칭하며 말을 이었다.


"상황은."


그녀는 귀에 꽂은 무선 수신기에서 나오는 백색소음을 묵묵히 들었다.

병장은 평소 버릇대로,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소대원들 모두 정위치입니다, 대위님.

유으렠 병장(Sergeant Yurek)에겐, 요새 정문에 초병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대위는 병장의 보고에 고개를 끄떡이며, 

중앙홀에 모여있는 귀족들, 부족 대표들, 그리고 사제들 무리를 둘러보았다.


"분리주의자 놈들이 좋아할 만한 상황이군.

사회에서 나름 힘깨나 쓴다는 분들이 여기 다 모여 계신 데,

경계 근무 중인 병사가 하나도 없어야 쓰나.

아무리 훌륭한 요새라도 빌어먹을 문이 활짝 열려있으면 무슨 소용이겠어.

현지인들을 잘 감시해.

인파가 좀 흩어지고 잠잠해지면, 난 캐스타몬(Castamon) 공(公)에게 찾아갈 거야.

수상쩍은 점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볼라드(Vollard)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캐스타몬(Castamon)님 말씀이십니까?"


"여기 계셔.

도착하는 모습을 직접 봤어.

레비작(Levizac) 대령과 루카누스(Lucanus) 소령께 현 상황을 설명하고 계시지.

내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말이야.

이거 농담 아니다.

우린 레기움(Regium)에 너무 오랫동안 방치됐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


"외람되지만 대위님, 

레기움(Regium)은 생크터스 선(Sanctus Line) 방어에 있어서 초석이라 할 만큼 중요한 곳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임무가 무엇이든 간에 

제게는 상부가 우리를 그냥 방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열외나 마찬가지인 취급을 받고 있어.

지하로 숨어든 이단자 무리나 뒤쫓는 건, 우리에게 어울리는 임무가 아니야.

그건 행성 방어 부대(Planetary Defence Force)에게나 맡기면 될 일이지.

우리가 여기서 꼼짝도 못 하고 갇혀서, 범죄자들이나 들쑤시고 다니는 동안에도

매일매일 성스러운 지구(Holy Terra)로 전쟁이 다가가고 있어."


볼라드(Vollard)는 만면에 과장된 웃음을 띠며, 대위를 어르듯이 말했다.


"대위님, 레기움(Regium)은-"


"레기움(Regium)은 중요하지.

나도 알고 있어.

난 빌어먹을 멍청이가 아니라구.

하지만 지금 생크터스 선(Sanctus Line)에 실제로 가해지는 위협은 없잖아.

캐스타몬(Castamon) 공은 

상당수의 울트라마린 1 중대(Ultramarines First Company)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

그리고 8 중대와 9 중대의 병력 일부도 예비 병력으로 보유하고 있고 말이야.

게다가 아무 설명도 없이 레기움(Regium) 출신이 아닌 보충대를 

행성 전역의 곳곳에 분산해서 배치했어.

태양계(Sol System)밖의 행성 중, 

이렇게까지 방어가 튼튼한 행성은 보기 드물걸.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여기에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대략 짐작은 가.

분명 누군가 꿍꿍이를 가지고 뒤에서 조작하는 게 분명해, 

그래서 우린 여기에 있으면서도 

울트라마린(Ultramarine)이 현 상황을 모두에게 전파해 준다는 브리핑에 참석하지 못했어.

레비작(Levizac) 대령 짓일 가능성이 커.

아님, 루카누스(Lucanus) 소령이 꾸민 일일 수도 있지.

거만한 허영 덩이들, 탁상공론이나 하는 둔탱이들.

케이디아(Cadia) 출신 용사들을 폄훼하느라 시간 낭비하는 걸 멈추고,

에어컨 밑에서 펜대나 굴리는 대신, 직접 자기 손을 좀 더럽혀 봐야 정신을 차릴 텐데.

우린 여기서 무의미하게 시간만 허비하고 있어.

내가 캐스타몬(Castamon) 공께 직접 말씀드리려는 게 바로 이거야."


대위는 캐스타몬(Castamon) 공께 다가가는 자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압박감에 위압 당하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일부 사람들은 신군(Adeptus Astartes)을 아름다운 존재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대위는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물론 스페이스 마린들이 장엄한 존재라는 건 그녀도 인정하지만, 

대부분의 인간과 외형적인 부분부터 차이가 큰 거대한 폐하의 전사들은 

대위에게 뭐라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사실 대위는 자신이 레기움(Regium)으로 발령 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자마자,

즉시 캐스타몬(Castamon) 공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명석한 지식인이자, 사나운 전사로서의 기질도 갖춘 거로 정평이 나 있는

울트라마린 1 중대(Ultramarines First Company) 소속 전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캐스타몬(Castamon)의 경력도 정말 화려했다.

대위는 그분이라면 반드시 이성적으로 말이 통할 것이라 확신했다. 


"사람들 말처럼 캐스타몬(Castamon) 공이 사려 깊은 현자시라면,"


대위가 말을 이었다.


"우리의 쓰임새에 대해 분명 더 잘 아실 거라 믿어.

그분이 말씀이라면 총독도 토를 달지 않을 것이고 말이지."


대위는 고갯짓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켰다.


"자, 정신 차려.

세으록(Seroc)이 막 연설을 시작하려 하잖아.

난 정신이 팔린 정치꾼들을 여기에 얌전히 있게 모아두고, 

캐스타몬(Castamon) 공이 브리핑하는 곳에 찾아가 볼 계획이야."


대위는 자리를 비우기 전에 볼라드(Vollard)에게 경고의 눈빛을 날렸다.


"잠시 나 없다고 너무 늘어지지 마.

네가 농땡이 부리는지 아닌지 다 아는 수가 있으니까." 



세으록(Seroc) 총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가 연단으로 향하면서 

제복의 장식용 술을 매만졌지만, 끝내 단정히 눕히지 못했다. 


"옥좌(Throne)시여,"


총독이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너무 많은 분들이 여기 모이셨군요.

우리 행성의 절반이 다, 여기 모인 건가요."


장신구가 모두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총독은 몸의 먼지를 털며,

작금의 상황에도 자신은 평안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턱을 최대한 들어 올렸다.

총독은 분명 비대하지만, 의외로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를 자랑했는데,

그의 커다랗고 다부진 체형은 그가 단순히 출렁이는 뱃살을 지닌 무절제한 바지 사장이 아니라,

곰처럼 쉬이 넘길 수 없는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지닌 인물처럼 보이게 했다.

특히 허리춤까지 길고 매끈하게 늘어진 석탄처럼 검고 풍성한 수염은 그의 위엄을 더욱 돋보였다.

총독은 풀을 너무 먹여 뻑뻑해진 겉옷과 

예복의 단단한 목깃이 두꺼운 목 위에서 서로 나대면서 충돌하는 탓에 

목이 졸리는 듯한 불편함을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저들은 답을 원합니다,"


라넼(Lanek)이라는 이름의 땅딸막한 보좌관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세으록(Seroc)과 같은 예복을 차려입은 그녀도 총독과 똑같은 불편을 겪고 있었다.


"아니."


세으록(Seroc)이 연단 위의 정치가와 고급 귀족들을 여유롭게 훑어보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여긴 아직 아무 문제 없어.

문 근처에 머물도록.

난 이게 끝나는 대로 여기서 나갈 거거든.

우린 할 일이 많아.

난 여기에 갇혀 있지 않을 거라고."


세으록(Seroc)은 보좌관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상황을 피하려고, 앞만 줄곧 바라보았다.

총독 자리를 꿰차고 있는 세으록(Seroc)은 

이제 공식적으로 그의 주변에 있는 그 어떤 최상류층 명문가 귀족보다도 높은 신분이었지만,

여전히 이런 자리에 오면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


이들 대부분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먹고 살기 위한 진짜 노동을 단 하루도 해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저들이 화려한 동작으로 부드럽고 우아한 자기 손을 총독에게 보일 때마다,

총독은 자신의 손에 남아있는 고된 노동의 흔적,

그러니까 뭉툭하고 군데군데 못이 박힌 자기 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


총독은 라넼(Lanek)을 포함한 보좌관들에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손짓하며 외쳤다.


"여기면 돼."


라넼(Lanek)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세으록(Seroc)이 느끼는 불편감이 전염되는 걸 막으려는 것처럼,

양옆을 바짝 치고 상대적으로 기장을 길게 남긴 윗머리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매만졌다.


"살라미스(Salamis)에 머무를 수도 있었잖아요. 

우리가 군락(Hive)을 떠나올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그녀는 품에서 담배(Lho-stick) 한 대를 꺼내 총독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렇게 직접 오실 필요는 전혀 없었다고요."


총독은 담배를 손으로 슬쩍 밀어냈다.


"이 사람들 좀 봐.

완전 겁에 질려있잖아.

난 살라미스(Salamis)의 생산이 서서히 감소하다가 중단되는 꼴은 못 봐.

그게 함선 단 한 대 분량이라도, 전체 물동량이 줄어드는 걸, 난 용납 못 한다고.

여기 모인 왕자님이나 공주님들이 방탕하게 나뒹굴건, 계집애처럼 징징대건 전혀 상관없어.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살라미스(Salamis)는 잘 굴러가야만 해.

어쩌다가 다른 지역 하나나 둘 쯤, 적의 손에 넘어가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우리의 주요 공업지역이 날아간다면,

생크터스 선(Sanctus Line) 전체가 큰 고난을 겪게 될 거야.

레기움(Regium)은 좋든 싫든 이 빌어먹을 촌극에서 기관실 역할을 맡고 있단 말이지.

연료와 탄약 공급이 끊긴다면 생크터스 선(Sanctus Line)이 얼마나 버티겠나?

십일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적이 없어.

내가 전체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이상,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모두가 다 내 잘못이라 떠들어대며 저주할걸."


세으록(Seroc)이 보좌관과 대화하는 중에 

가발을 쓴 상인 하나가 총독의 눈길을 끌려는 듯 눈을 마주쳐 왔다.

세으록(Seroc)과 라넼(Lanek)은 따스한 시선을 보이기는커녕,

상인이 다른 사람에게 볼일이 있다는 것처럼 눈을 돌리고 슬쩍 자리를 피할 때까지,

상인을 부모님의 원수 보듯이 노려보았다.


세으록(Seroc)은 다시 예복에서 먼지를 터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나 어떻게 보여?"


총독은 어색하지 않냐는 듯이 라넼(Lanek)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총독의 예복 몇 군데 묻은 진흙을 떼고 옷매무시를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좋아요."


총독은 옷을 한껏 당기며 투덜거렸다.


"나 완전 바보처럼 보일 텐데."


"최고로 멋지십니다."


그녀의 말에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세으록(Seroc)은 웃었다.

평정을 되찾은 총독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엄숙한 표정으로 단상 위로 올랐다.

군중 대부분은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고, 일부는 그 자리에서 무릎까지 꿇었으며,

극소수지만 아예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황제 본인이 이곳에 직접 행차하신 건 아닐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총독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낮게 꾸짖으며, 성가시니 전부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증거자(Confessor) 투르가우(Thurgau)와 다른 사제들이 

총독의 양 측면을 수행하면서 기도를 중얼거리며 향로를 흔들어 대자,

주변 사람들은 총독이 연단 중심부에 쉬이 도달할 수 있게 뒤로 물러섰다.

꼭대기에 오른 총독은 주변의 흥분이 가라앉고, 침묵이 지배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정적이 감도는 순간 총독은 갑자기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외쳤다.


"황제 폐하를 위해!"


증폭 장치를 쓴 것도 아닌데, 그의 목소리는 중앙홀 전체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총독의 외침에 잠시 동안 홀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정적이 흘렀다.


군중들은 뒤이어 정신을 차린 듯, 

총독을 따라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중앙홀이 떠나가게 같은 구호를 외쳤다.


"친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이 요새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총독이 말했다.


"몇몇 분들은 여기까지 오느라, 행정구역을 반이나 지나왔겠구려.

여러분 모두가 부득이하게 뒤에 남기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염려하고 계신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소만.

내 말을 듣고 나면, 댁으로 다시 귀가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소.

'제현'들께서는 이 무시무시한 악몽들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고 계시지요."


총독은 자기 입에서 반말과 존대가 섞여 나오며 말투가 꼬이기 시작하자, 

긴장을 풀기 위해 다시 말을 멈췄다.


"총독님,"


한 귀족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는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명백한 경멸의 눈초리로 세으록(Seroc)을 쏘아보았다.


"외람되오나 악몽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 정의할 만큼 만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바난드(Vanand) 반도 전체가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났습니다.

현재 살라미스 군락(Salamis Hive)으로 가는 통로 중,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경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벌써 십여 개가 넘는 물자 수송편이 행방불명되었고요.

주 전체가 이번 폭동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그 여파로 모든 길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고요."


자신의 발언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귀족의 목소리에는 한층 더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제 필수적인 연료 수송마저 위태로울 지경입니다.

행성 전체가 심각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어요.

도시들이 전부 불타오르고 있단 말입니다.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한 소식은 하나도 없지만,

수백 명의 시체들과 그걸 그냥 현장에서 소각해버리는 걸 목격했다는 

정말 끔찍한 소문들까지 돌더군요."


"쉘립시(Shellib City)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귀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앙 홀 반대편에 서 있던 다른 여성이 외쳤다.


"아무도 군락(Hive)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데다가,

군락(Hive) 내부에선 밤낮으로 끝없이 불길이 타오르고 있어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이 일련의 공격 목적에 대해 아시는 분 계시나요?

분리주의자 놈들은 우리에게 뭘 바라는 거죠?

놈들이 원하는 게 정확히 뭘까요?"


뒤이어 자신들이 겪거나 들은 폭력과 무질서를 털어놓는 흥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술에 취한 주당들의 합창 소리처럼 중앙홀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세으록(Seroc)은 군중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몇몇 사람들은 이야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총독의 손짓을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도서관 내부엔 다시금 고요함이 찾아왔다.


세으록(Seroc)은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어쩌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는지를 되새겨보았다.


레기움(Regium)에 도착한 울트라마린(Ultramarine)들이 처음으로 한 일은

전임 총독을 처형하고, 그의 명령체계를 와해시키는 작업이었다. 

세으록(Seroc)은 구체제의 붕괴를 눈앞에서 목격했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간 레기움(Regium)의 지배자들은 

그들을 뒤에서 직접 지배하는 범죄자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뒤에 일어난 일 때문에 깜짝 놀랐다.

캐스타몬(Castamon) 공이 자신을 소환해,

통치국(Adeptus Administratum) 논리학자(Logisticar)들의 판단에 따라,

자신이 레기움(Regium)을 맡아 주재(主宰)하는 총독이 되었다고 일방적으로 공지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취임하고 몇 달이 지나자, 이 천우신조의 기회를 나름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그는, 

자신이 벌려온 크고 작은 사기를 숨기는 데 급급한, 

자신의 이익만 따지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세으록(Seroc)이 총독이라는 새로운 직무를 맡고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은 건,

그런 자신조차 인재로 느껴질 정도로 

전임 총독들의 무능함과 후안무치한 행적은 기가 찬 수준이었다.

자신도 조금만 노력하면, 그들보다 훨씬 좋은 총독이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실제로 그는 살라미스 군락(Salamis Hive)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세으록(Seroc)은 자신이 총독 자리에 있는 이상,

레기움(Regium)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는 걸 좌시하지 않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총독은 마음속으로 캐스타몬(Castamon) 공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 울트라마린(Ultramarine)이 보여준 침착하고 진중한 목소리를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여러분이 마주한 어려움과 문제점은 모두 인식하고 있소.

나 역시 살라미스 군락(Salamis Hive)에서 같은 문제에 봉착해있지.

그런데도 내가 오늘 여기 나온 건 여러분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해서요.

나는 울트라마린(Ultramarine) 책임자인 캐스타몬(Castamon) 공에게 

작금의 폭력성과 광기를 유발하게 된 원인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달라 말했소.

이건 캐스타몬(Castamon) 공이 이전에 벌써 겪어 본 현상이라 하외다.

우리 성계(System) 끝자락에 소규모 외계인 함대가 출현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 하오."


놀란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면서 다시금 중앙홀이 소란스러워지자,

총독은 다시 손을 들어 올리고는 좌중이 침묵할 때까지 기다렸다.


"저 외계인들은 여기에 있는 우리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소.

거기에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울트라마린(Ultramarine)들이 직접 함선을 몰고 나갔지.

캐스타몬(Castamon) 공은 나에게 저 외계인들의 함대가 박살이 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전부 해결될 거라 공언했소.

머지않아 우리에게 다시금, 평안이 찾아올 거라는 말이요.

하지만 일단 그때까지 우리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모든 우주군 연대(Militarum regiment)들은 필요에 따라 재배치 될 예정이오. 

그와 관련해서 울트라마린(Ultramarine)이 군 수뇌부를 모아 놓고 브리핑하고 있소.

내가 살라미스 군락(Salamis Hive)의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동안,

모든 병력은 최우선으로 인구 밀집 지역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투입될 것이요.

난 이 요새에 안락하게 남아있는 대신,

제국에 납부할 올해 치 십일조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북쪽 군락(Hive)으로 돌아가 직접 지휘를 계속할 작정이고,

그 여정에 카르포바(Karpova) 대위와 그녀 휘하의 연대 전원을 대동할 예정이오."


총독의 말에 카르포바(Karpova)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으록(Seroc)은 분노에 찬 대위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캐스타몬(Castamon)이 그에게 미리 언질을 준 대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캐스타몬(Castamon) 공의 조언에 따라, 

카르포바(Karpova) 대위와 그녀의 연대를 데려가기로 했소."


카르포바(Karpova)의 눈에 서렸던 분노는 호기심과 섞이면서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캐스타몬(Castamon) 공은 그녀의 경력을 면밀하게 조사했고,

그 결과 대위가 제국의 가장 탁월한 지휘관 중 하나가 분명하다고 확인해 주었소."


총독은 방안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캐스타몬(Castamon) 공은 내게,

퀴누스 포(Cynus Ⅳ)에서 후위를 맡았을 때, 대위가 굉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했고,

세스토스 프라임(Sestos Prime)의 포위를 푼 것도 그녀이며,

이게 그녀가 전술가로서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내게 침이 마르게 칭찬했소이다."


총독은 여기 모여있는 대부분의 레기움(Regium) 토박이들에게 

자신이 지금 늘어놓는 전사(戰史)가 생소하고 낯선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쏟아 놓는 말은 표적에 정확하게 적중하는 중이었다.


어느새 카르포바(Karpova) 대위의 눈에선 노여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게다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위는 조금이라도 더 반듯하게 서려고 노력했다.

대위의 얼굴에 상처가 더 적었다면, 

총독은 숫처녀처럼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마주할지도 몰랐다.

세으록(Seroc)은 스페이스 마린이 준 조언의 정확도에 매우 감명받았다.

캐스타몬(Castamon)은 대위가 총독 따르게 만드는 정확한 방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일단 살라미스(Salamis)의 통제력이 회복되면, 

다른 지역들도 최대한 빨리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게 하겠소."


총독은 당당하게 군중을 돌아보았다.


"살라미스(Salamis)는 내 전임자들의 방탕과 실정 때문에, 

잘못된 관리를 받아오며 방치되어 그 정신까지 썩어 문드러진 상태요.

그 덕에 선동가들과 미치광이들이 제멋대로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

카르포바(Karpova) 대위와 그녀의 연대원들이라면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소.

아니, 해결 정도로 멈추는 게 아니라, 문제점을 그 뿌리부터 발본색원해낼 것이오.

이와 같은 이유에서 

교계내무아문(敎界內務衙門;  Adeptus Ministorum) 소속의 증거자(Confessor), 

투르가우(Thurgau)도 나와 함께 군락(Hive)으로 향할 예정이오.

목자가 길 잃은 양들을 다시 우리로 데려오듯,

그와 그의 사제들이 믿음을 잃은 자들에게 다시 믿음을 전파할 것이라 보오.

난 신앙과 군사력이 잠시 길을 잃은 지역들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소.

하지만 그러려면 여러분도 여러분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오.

캐스타몬(Castamon) 공은 내게, 작금의 사태가 금세 끝나리라 장담했소."


총독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폭력과 이단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해야 마땅하오."


총독은 군중 대다수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호응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살짝 놀라면서도 기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질문 공세를 펼치려고, 

질세라 손을 드는 광경을 마주했다. 


잠시 동안 총독은 여기에 머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건넬지를 갈등했지만,

곧 자신에게 더 좋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증거자(Confessor) 투르가우(Thurgau),"


총독은 몸을 돌려 사제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내겐 꼭 출석해야 하는 시급을 다투는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아직 사제님의 설교를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지금이,

사제님이 짊어진 레기움(Regium)에서의 거룩한 사명에 관해 설명할 좋은 기회라 생각되오만."


투르가우(Thurgau)의 눈이 밝게 빛났다.

사제는 부드러운 손길로 법복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총독 각하."


좌중에서 야유와 반발에 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투르가우(Thurgau)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잽싸게 단상으로 올라가서는

양손을 들어 올려 군중의 동요를 박수갈채라도 된다는 듯이 온몸으로 받아넘겼다.


"신성한 옥좌의 아이들아, 내 너희에게 인류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의 영광된 소식을 전하노니."


중앙홀의 모든 이가 투르가우(Thurgau)의 설교에 물 흐르듯 부드럽게 빠져드는 동안,

세으록(Seroc)은 감히 그에게 말을 걸려고 나서는 용감한 자들을 

살기 등등한 도끼눈으로 뿌리치면서 연단을 내려와 그대로 문으로 향했다.


"아직 정치가가 될 자질이 충분하신데요, 각하."


라넼(Lanek)이 총독을 따라 재빠르게 도서관을 빠져나오면서 말했다.


※ 대장상 : 그 대리자들과 함께 성직자회 전체 또는 일부를 다스리는 자


리바이어던(Leviathan) 제 3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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