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혈통 (Bloodlines) 2


1 장에서 이어집니다.




제 2장


아우구스토 지다로프(Agusto Zidarov)는 몸을 최대한 낮춘 채로,

애용하는 권총인 쓰자으리나(Tzarina) 자동 권총을 뽑아들고,

금속으로된 비계 통로들 사이를 엉금엉금 기다시피하며 지나갔다.

방탄 조끼 아래는 땀으로 푹 쩔어있었다.

이곳은 너무 더운데다가, 심지어 어둡기까지 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모든 면에서 볼때,

그는 정말로 이곳에 오기 싫었다.


"지금 어디야?"


그는 무전기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브레히트(Brecht)는 답변하는 것도 오래 걸렸다.


"지원을 가고 있어. 

앞으로 십 분."


그건 너무 늦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눈을 깜박여서 

인공 홍채에 삽입된 시각 필터를 작동시켰다.

주변 시야가 필터에 따라 단속적으로 변하면서,

한 치 앞도 모르겠는 칠흙 같은 어둠에서,

그나마 볼 수 있는 어둠으로 바뀌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비계 통로는 

서서히 위를 향해 또아리를 트는 뱀처럼 

거대한 기계 주위를 돌며 위로 오르는 형태였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서 

동력로 단자의 열 교환기가 

열심히 일하면서 내뿜는 열기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여과 장치들은 과열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지지대와 무수하게 얽힌 파이프들 사이로 계속 올라가자,

기름 냄새가 섞인 녹슨 금속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주변은 다양한 파이프와 의미 불명의 처리 장비, 

얇고 굵은 전선들, 용도를 알 수 없는 밸브들, 

그리고 여러 지지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는 숨을 곳이 너무나 많았고,

너무나 많은 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갑자기 터져나오는 증기가 그의 몸과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열기가 그의 눈에서 눈물을 짜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권총을 다시 거머쥐었다.

어둠과 증기, 그리고 열기 속에서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기기 위해

그는 눈을 최대한 가늘게 뜨고 천천히 나아갔다.


"난 아무래도 널 이해할 수가 없어."

지다로프(Zidarov)가 말했다.


"난 자넬 잘 이해하는데."

브레히트(Brecht)가 답변했다.

"자네에게 이렇게 가고 있잖아."


"그럼 좀 빨리 오라고."


브레히트(Brecht)는 보통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지다로프(Zidarov)는 제발 이번엔 그가 좀 빨리 움직이길 바랬다.

지금 상황에서 브레히트(Brecht)에게 

그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빠른 움직임 뿐이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갑자기 나타난 교차로에 멈춰섰다.

통로는 이제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왼쪽,

다른 하나는 오른쪽으로.


그의 발 아래, 

얇은 격자무니 금속 통로 아래로는

강철로된 기계들이 불꽃을 뿜으며 갈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각종 도관과 전선들로 이루어진 쥐들의 천국이 보였다.

그곳은 광원이 매우 희박했다.

아주 작은 붉은 점들만이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핏덩이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그런 그곳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그리고 지다로프(Zidarov)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저 큰 원형 밸브가 돌아가고 있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이곳은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이건 치안관(Sanctioner)의 일상적인 업무였다.

이들은 방탄복을 착용하고 무기를 휴대한다.

지다로프(Zidarov) 역시, 

그가 애용하는 권총과 함께 기본 방탄복을 착용했고,

자신이 수사관(Probator)임을 증명하는 홀로그램 인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장비는 지금까지 여러 번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정말 여러 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그 세 장비 중 어떤 것도 미더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인공 홍채를 통해 정보를 점검했다.

안구 피하 이식을 통해 그의 눈에 장착된 이 복합 정보감시용 장비는 

주변 환경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망막에 직접 정보를 투영하여 다양한 정보를 검색 및 투영할 수 있었다.

정보창이 돌아가다가 그가 원하는 곳에서 멈추더니,

그가 지금 제일 원하는 정보인 

용의자의 최신 이동 경로 예측 결과를 망막에 투영해주었다.

하지만 이 장비는 기본적으로 주변의 열을 감지하여 작동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환경 하에서는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그는 애초에 여기에 올 필요가 없었다.

사실 그는 브레히트(Brecht)가 부르는 지원 요청 때문에 여기에 왔다.

그가 수사하는 사건도 아니었고, 그가 담당하는 일도 아니었지만,

순수하게 호의로 돕다가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다.


치안청 규정대로라면, 

그들은 치안청 타격대가 도착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브레히트(Brecht)는 용의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둘이서만 돌입한 것도 후회되는 결정이었는데,

출구를 막는답시고, 둘이서 또 갈라져서 내려온 게 더 후회되었다.

얼마나 많은 적들이 그늘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르는 데다가,

이 아래가 이렇게 넓고 복잡한 곳일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는 오른쪽 갈림길을 택했다.

오른쪽 통로에는 허술해 보이는 얇은 철책이 한쪽에만 이어져 있었고,

반대편은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는 낭떠러지였다.

그 끄트머리에는 

녹슬은 톱니바퀴와 해골 문양이 새겨진 두터운 격벽이 보였고,

그 너머에 두터운 강철로 보강된 출입구가 있었다.

출입문 위, 현창에는 

김이 부옇게 서려 있었다.


출입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로 살짝 열려 있었고,

그 틈바구니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내가 그놈 찾은 것 같아."


지다로프(Zidarov)가 가만가만 이야기했다.


"지금 대체 어디야?"


"바로 윗층이야.

날 믿어 지금 뛰어가고 있다구."


지다로프(Zidarov)는 뱀처럼 납짝 엎드려 통로에 거의 붙다시피 하면서, 

문을 향해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런 그의 귀에 멀리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한 신발 한쌍이 강철 통로를 때리는 소리였다. 


브레히트(Brecht)가 애타게 찾던 용의자가 지금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유리 글라브(Yuri Glav),

유으르게이에나(Urgeyena)에서는 제법 잘나가는 총기 밀수업 중간책이었던 그는 

불안정한 마약 중독자였다.

그리고 그 믿음직스럽지 못한 성미 탓에 

경무관(Enforcer)과 그의 고객, 양쪽 모두에게 척을 지게 되었고,

이제 음지와 양지, 모든 곳에서 쫒기는 신세였다.

솔직히 이제 와서 그와 함께 무슨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하려 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다른 편 출입구가 벌컥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출입문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불이 갑자기 꺼졌고,

반대편 복도를 따라 뛰어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용의자가 그들이 왔다는 걸 눈치채고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반대편 복도로 길 끝까지 따라 내려가, 

자기부상 열차(Mag Train)나 다른 교통수단을 잡아타고 도주하려는 속셈일 터였다.


지다로프(Zidarov)는 재빠르게 앞으로 뛰쳐나가, 

어깨로 출입문을 강하게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자동 권총을 겨누며 방 안을 살폈다.

반대편 문이 활짝 열려있는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바로 반대편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반대편 통로는 거의 낙하하는 듯한 급한 경사로로 이어져 있었다.

통로의 조명은 불규칙하게 계속 껌벅거렸고,

어디선가 금속이 타는 냄새가 났다.


이제 지다로프(Zidarov)의 귀에는 

앞에서 달리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수직이나 마찬가지인 통로를 급하게 따라 내려가는 금속성 메아리였다.

양쪽 다 전력을 다해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지다로프(Zidarov)는 용의자를 거의 따라잡았다.

또 다시 용의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총알처럼 작은 해치를 통과했다.


갑자기 그는 거대한 공간에 서 있었다.

거대한 공간의 끝은 밤하늘과 맞닿아 있어

뜨겁고 먼지가 가득한 돌풍이 공간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반대편 벽에는 거대한 기둥들이 행진하듯이 오와 열을 맞춰 서서, 

거대한 대들보와 다양한 파이프들로 구성된 높은 천장을 지지하고 서있었고,

무한궤도가 달린 짐차들이 그 아래 주차장에 줄지어 놓여있었다.


지다로프(Zidarov)가 지금 서있는 곳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아, 

저 멀리 가스 배출구의 화염 사이로 아스란히 서있는 냉갑탑까지 보였다.

주변의 모든 곳에서 재와 먼지 그리고 화합물 냄새가 났다.


공간의 머나먼 끝에 연료 수송차 하나가 적재소에 멈춰서 있었다.

연료 수송차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엔진은 이미 돌아가고 있으며,

지금이라도 당장 고가교(高架橋) 진입로로 들어설 기세였다.

연료 수송차 운행 담당 종복(從僕; Servitor)은 척추가 부러진 채,

연료 수송차 바퀴 옆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헐렁한 붉은 색 조끼를 걸친 말라깽이 글라브(Glav)는 

연료 수송차에 연결된 연료 공급관을 뽑아내기 위해

수송차의 운전석 디딤판에서 막 뛰어내리는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거대한 덩치의 글라브(Glav) 경호원 둘이 지다로프(Zidarov)를 덮쳤다.

약물로 키웠을게 분명한 육중한 근육질의 사내들은

각각 표면에 전기가 흐르는 떡메와 총신을 짧게 자른 산탄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산탄총이 불을 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지다로프(Zidarov)는 엄폐물로 날아들었다.

그는 지게차의 두터운 차체 뒤로 몸을 날린 뒤,

운전석 문을 어깨로 들이받아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날아온 산탄들이 차체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음을 빚어냈다.


지다로프(Zidarov)는 몸을 활처럼 굽히면서 

무릎 사이로 쓰자으리나(Tzarina) 총구를 들어올려

지게차의 무한궤도 사이로 산탄총을 든 경호원을 노리고 발사했다.

탄환 네 발이 산탄총을 든 경호원의 가슴팍을 때리자,

상대는 피보라를 뿜으며 스러졌다.


지다로프(Zidarov)가 다시 자세를 추스리려는 찰나,

두 번째 경호원이 지직거리는 육중한 떡메를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지다로프(Zidarov)가 반사적으로 양쪽 어깨에 총격을 가하자,

두 번째 경호원은 박제당한 박쥐처럼 뒷벽으로 날아갔고,

떡메는 힘없이 금속 격자 바닥 위에서 굴렀다. 


지다로프(Zidarov)는 재빨리 자세를 다잡고 글라브(Glav)를 정조준했다.


그사이 말라깽이 총기 밀수업자는 연료관을 뽑아내고, 

연료 수송차 운전석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강제로 뽑힌 연료관에서는 정제된 프로메슘(Promethium)이 솨 쏟아져 나왔다.


지다로프(Zidarov)는 신중하게 용의자를 피해, 

연료 수송차 주변으로 경고 사격 두 발을 쏘았다.


"치안 요새 유(U) 소속. 수사관(Probator)이다!"


그가 소리쳤다.


"거기서 꼼짝마!"


글라브(Glav)는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만 더가면 글라브(Glav)는 운전석 디딤판에 오를 수 있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용의자의 등을 겨냥하고 한 발을 더 쏘았다.


지다로프(Zidarov)의 총격은 정확히 글라브(Glav)의 등을 명중시켰지만,

그가 조끼 밑에 덧입고 있던 중장갑 방탄복때문에

총탄은 피보라를 뿜어내는 대신, 둔탁한 소음과 함께 튕겨나왔다.

총격은 튕겨나왔지만. 

그 충격 때문에

글라브(Glav)는 운전석 손잡이를 놓치고 앞으로 밀려

차디찬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글라브(Glav)는 바닥에 굴러 떨어졌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기면서 몸을 굴려 총을 꺼냈다.


다음 순간, 

지다로프(Zidarov)의 눈에 

글라브(Glav)의 검은 총구가 정확히 그를 겨냥한 것이 보였다.


바로 그때, 

총성이 울리며 글라브(Glav)의 머리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총기 밀수업자의 몸은 바닥을 때리고, 

한 번 경련하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브레히트(Brecht)가 해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양손에 꽉 쥐인 자동 권총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의 얼굴은 훈련된 집중력으로 굳어있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긴장을 토해내며 내뱉았다.


"성스런 황제시여.

자네 정말 뛰어왔군."


연료 수송차의 엔진은 아직도 돌아가고 있었다.

강제로 뽑혀나온 연료관에서는 

정제된 프로메슘(Promethium)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브레히트(Brecht)는 권총을 집어 넣고, 첨벙이는 바닥을 지나 연료관을 잠갔다.

그는 턱밑까지 붉게 상기된 채로 여전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브레히트(Brecht)는 막 벗겨져가는 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덩치가 큰 친구였다.

원래 경무관(Enforcer)에 채용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건장한 체형을 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남다르게 건장하고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체격에 맞춰 특수 제작된 방탄복은 

그의 체구를 더욱 크게 보이게 했다.

그에 비해 지다로프(Zidarov)는 체구면에서는 그의 어깨에도 못 미쳤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쿵쾅대고 있었고,

굵은 땀방울이 그의 등 뒤로 흘러내려 옷 속에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시체 셋을 둘러보았다.

경호원들은 그저 용병에 불과했다.

하지만 글라브(Glav)는 뭔가 정보를 쥐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글라브(Glav)를 사살하는 대신, 산채로 체포했어야 했다.

어쨌든 이건 브레히트(Brecht)의 사건이었고,

자신이 스스로 끝장내버린 사건이었다.


그는 연료 수송차의 운전석에 올라가 운전석 제어판을 조작해 엔진을 멈췄다.

운전석에서 내려온 그는 숨을 다잡은 뒤, 

동료 수사관(Probator)을 바라보았다.


"이럴만한 가치가 있었나?"


지다로프(Zidarov)가 물었다.


브레히트(Brecht)는 땀범벅인 머리를 힘껏 저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글라브(Glav)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럴 만했지.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었거든."


"생포하길 바랬군, 그렇지?"


"그래, 하지만 이놈이 널 쏘려고 했어."


"아니, 이런 놈은 날 못 맞춰."


"글쎄, 총 솜씨는 좋았던 놈이야.

쐈으면 제대로 맞췄을 거야."


지다로프(Zidarov)는 그제서야 권총을 집어넣었다.


"뭐, 그럼 고맙다고 해두지."


"도움이 됐다니 기쁘군."


지다로프(Zidarov)는 멀리서 다가오는

주로프(Zurov)형(形) 공격 헬기의 독특한 터빈 엔진 소리를 들었다. 

그 안에는 긴급 출동한 즉응(卽應) 대기반 소속, 

중무장 부대원 여섯이 타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이미 용의자의 도주를 상정하고, 

용의자를 추적 및 생포하기 위해, 

야시장비(夜視裝備)와 섬광탄, 자동소총,

그리고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검은 색으로 칠한 두터운 장갑복 등으로 무장하고

바쁘게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을 터였다.


"저 친구들 아마 엄청 화내겠지, 응?"


지다로프(Zidarov)가 말했다.


"그래, 아마 그러겠지."


"자, 그럼 뒷처리는 자네에게 맡기고 난 슬슬 퇴장할 시간인 것 같은데."


"그래, 그래도 될 것 같아."


지다로프(Zidarov)는 브레히트(Brecht)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섰다.


"아, 그러니까 - 음, 고마워,"


브레히트(Brecht)가 그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이 신세 꼭 갚을께."


"꼭 갚아야 돼."


"언제든지."


"그래,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갚아야 할걸."


지다로프(Zidarov)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게차 문에 받힌 어깨가 시리기 시작했다.


"이제 난, 집에 간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는 깨어났다.

온몸이 지끈지끈 아팠고, 전신이 다 시큰거리고 쑤셨다.

아직도 독한 화합물들 냄새가 코끝에서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가 지금 자기 집에 돌아와 누워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옆으로 손을 뻗쳤다.

두터운 침대보가 그의 팔에 밀려 약간 미끄러져 내렸고,

그는 손가락으로 침대보 위를 걷는 듯이 움직이며 수색을 시작했다.

밀리자(Milija)는 몸을 뒤척이며 매트리스 더 안쪽으로 도망쳤다.


"자게 좀 냅둬."

그녀는 잠결에 웅얼거렸고,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찾았다.


방안은 아직 어두웠다.

창문에 내려와 있는 셔터 틈새로 가늘게 회색 빛이 보였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시계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아침이야."

그가 말했다.


그녀는 반쯤 잠에 빠진 채, 

가르릉거리면서 그녀의 팔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쳐냈다.


"지난 밤엔 어디 갔었어?"


"일하러."


"흐음.

물론 그러시겠지."


그는 남아있는 잠기운이 가실때까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잠이 깨자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두터운 합성 양모 이불 냄새가 났다,

경석콘크리트(Rockcrete) 위에 발라진 광택제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밤새 흘린 그의 땀냄새가 났다.

집이다.


그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합성 양모 이불이 옆으로 밀려났고,

침대 뼈대가 흔들릴 정도로 큰 움직임이었다.

밀리자(Milija)가 몸을 돌리며 베개 속으로 더 파고들자,

그녀의 얼굴이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에 덮여 사라졌다.


지다로프(Zidarov)는 발을 세차게 디디며 침대를 나왔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플라스틱 섬유 재질의 가운를 꺼내 잠옷 위에 걸쳤다.


아직 세계는 고요했다.

물론 저 아래 도로는 쉴새없이 소음을 내뱉았다.

밤이건 낮이건 한시도 쉬지않고 차량들이 달리며 시끄러웠지만,

익숙해지면 환경의 일부처럼 그다지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그는 밀리자(Milija)와 낵시(Naxi)의 사진이 걸려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갔다.

벽의 회반죽은 일부가 떨어져 나와 부스러져 있었다.

그는 벽을 볼 때마다 회반죽을 다시 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낵시(Naxi)를 낳은 직후, 

새로운 거주 구역을 배정 받아 이사한 그날부터  

지다로프(Zidarov)는 매번 저 벽을 볼때마다 다시 칠해야지 하면서도

수 년째 그냥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언젠간 꼭 시간을 내리라.


그는 부엌에 들어가 손가락을 휘둘러 조명을 켰다.


나트륨관이 껌벅이며 켜지자,

낡았지만 청결한 조리대와 깔끔하게 정렬된 음식 상자들,

그리고 의자 넷 딸린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카페인 제조기 전원을 켜자, 기계는 덜커덕거리며 깨어났다.

그는 음식 보관통에서 탄수화물 바(Carb-bar)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아무 맛도 첨가하지 않은 제품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당 시럽이 첨가된 제품이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둘 다 가열기에 넣고, 10 초간 돌렸다.

카페인 제조기가 만들어낸 뜨거운 카페인잔을 든 그는

접시를 꺼내 데워진 탄수화물 바(Carb-bar)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식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지다로프(Zidarov)는 카페인을 홀짝이며 그 따뜻한 온기를 즐겼다.


그는 멀리있는 벽에 달린 영상 투영기를 작동시켰다.

이 영상 투영기는 그가 직접 사서 단 제품으로

이제는 가끔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밀리자(Milija)는 매번 이제 새 영상 투영기를 사야 한다고 말했다.


구식 타원형 브라운관이 지직거리면서, 

중앙에서 가장자리로 빛을 뿌리며 깨어났다.

어두운 방 안이, 

영상 투영기가 내보내는 노란색을 띤 흰색 빛으로 희미하게 밝아졌다. 


'…하위-구역 위생과 국장 에으르틸 폰(Ertile Vom)씨는 어제,

전분기보다 생산량을 증가시킨 노동자들을 치하하기 위해

유(U) 56 구역 시설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녀는 분기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 시행된 개선안들을 살펴보고,

우리 모두가 위대한…'


하위-구역 위생과 국장 에으르틸 폰(Ertile Vom)양은 

다른 일반 시민들보다 영양 공급을 잘 받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다로프(Zidarov)는 

생산 라인을 따라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는 그녀를 무심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몸매는 인광색으로 빛나는 화면 위에서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흠, 아마 저 제조소의 생산력은 또 올라갈 것이다.

생산력을 오르고 또 오른다, 내년, 후년, 그리고 내후년까지 계속.

효율성의 기적이겠지.

이런 거침없는 증가세를 유지하려면 기적이 빠질 수 없을것이다.


지다로프(Zidarov)는 영상 투영기가 제멋대로 떠들게 놔두고,

탄수화물 바(Carb-bar)를 한 입 베어물었다.

그리고 마시는 카페인 한 모금은 

정제되지 않은 프로메슘(Promethium)만큼이나 달콤했다.

그는 온 몸으로 따스함이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전신이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탄수화물 바(Carb-bar)도 좋았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오래 전부터 그는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절대로 펴지지 않을 것 같은 근육들의 긴장과 뭉침을 풀어주기 위해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자 그의 흉부에 자리잡은 오래된 상처가 

그에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그리고 아직도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살짝 경련하며 당기는 느낌이 났다.


영상은 이제 주요 항구에서 부려지는 각종 상품들을 알아보고, 

그 생산량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기적처럼 또 증가세를 유지했다.

직업상 싫어도 그의 귀에 들어오는 소문에 따르면, 

작금의 상황에서 성간 교역이나 무역상의 왕래는

몇 달간 거의 멸종된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브레히트(Brecht)의 말에 따르면,  

몇 달 전, 자신이 해군 기밀 서류를 우연히 접했는데,

주요 성간 항로에서 뭔가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고,

구역 해군 사령관들이 병력을 이끌고 긴급 대응에 나섰다고 했다. 

브레히트(Brecht)가 모든 면에서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한 면모를 보여주도 것이 사실이지만,

가끔 음모론에 너무 깊이 파고들어 걱정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 이후로 브레히트(Brecht)가 다시 그 문제를 언급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 함구령을 내린 걸지도 몰랐다.


지다로프(Zidarov)는 카페인잔을 다 비운 후,

밀리자(Milija)에게도 한 잔을 타주기 위해 기계로 다가갔다. 

그는 평소처럼 그녀가 일어난 뒤에 쉽게 마실 수 있도록, 

방금 타낸 카페인 한 잔을 따끈한 열판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홍채를 이용해 정보창에 접속했다. 

지다로프(Zidarov)는 세부 항목에 접속하기 위해, 

광대뼈를 따라 심어져있는 이식물을 추가로 조작했다.

정보가 업데이트 되면서 이식물을 따라 살짝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정보가 다 수신되자, 

그는 하나씩 하나씩 망막에 투영하면서 내용을 확인했다.

도자기 장인이 방금 가마에서 꺼낸 도자기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옆으로 치우거나, 처리장으로 던져버리듯이 

지다로프(Zidarov)는 눈 앞에 떠오른 현란한 녹색 문자들을 

하나씩 살펴보거나 옆으로 던져버렸다.  


이 모든 확인 작업은 그의 망막에 직접 투영되는 영상으로 진행되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지다로프(Zidarov)가 뭘 보는지, 

그 내용을 절대 알 수 없었다.


대부분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내용이었다.


봉겔라(Vongella)는 여전히 자기가 처리하기 귀찮거나,

상부에 보고해서 처리하기 싫은 일들을 

일선 수사관(Probator)들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대부분 이미 일차 보고가 끝났거나 참조문이 있는 내용들로

시간만 충분히 허용된다면, 누가 해도 끝낼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중에 한 보고가 그의 주목을 끌었다.


> 456aa78-X, 사건 기록 : 우드밀 테으라스효바(Udmil Terashova), 

테으라스효바 조합(Terashova Combine) [파일, 세부사항] PJv


맨 뒤에 있는 분류 코드에 피(P) 코드가 있다는 것은

사건 해결을 위해 수사관(Probator)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건 기록과 달리 이름 항목 뒤에 

어느 구역에서 올라온 기록인지를 명시하고 있지 않았다.

이런건 보통 구역 외에서 올라온 내용이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무심하게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려 했다.

이런 사건은 기꺼이 브레히트(Brecht)같은 친구들에게 넘길 수 있었다.

어찌됐건 브레히트(Brecht)도 빚은 갚아야 되니 말이다.


> 총경(總警; Castellan) 직접 지시

해당 사건에 아우구스토 지다로프(Zidarov, A) 수사관(Probator)을 배정한다.


지다로프(Zidarov)는 가슴이 철렁했다.

빌어먹을.

그는 사건 관련 파일를 홍채 안에 내장된 장기 저장장치에 저장했다.

이건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탄수화물 바(Carb-bar)를 하나 꺼내

밀리자(Milija)에게 주려고 가열기에서 낮은 온도로 데웠다.

그리고 기계들이 일을 하는 사이, 

위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펄스 샤워기가 이게 마치 그에게 주는 마지막 행운이라는 듯, 

한 번만에 정상적으로 완벽하게 작동했다.

그는 몸에 남아있는 화합물 찌꺼기들을 완전히 닦아내고,

구강 청결제를 꺼내 입안을 닦아낸 뒤,

눈 밑에 난 붉은 선들을 살폈다.


그는 살짝 얼룰진 거울로 상처를 살피다가,

문득 거울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건장한 사내를 마주보았다.

어둡고 혈색이 나쁜 얼굴을 가진 

짧은 검은 머리의 사십대 초기의 남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밝은 등 아래에서 더 생생하게 보였다.

수사관 생활 초기에 가졌던 단단한 배짱은 

지난 몇 년간 다양한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이제 많이 물렁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배포가 커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총총걸음으로 마루를 지나 두 번째 방으로 향했다.


이 방은 한 때 낵시(Naxi)의 방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방이 그녀의 방이라는 것처럼 

빛바랜 낵시(Naxi)의 사진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각같이 생긴 남자 군인 하나가 

강철같이 단호한 표정으로 서있는 모병 포스터가 하나,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받았던 성적표와 통지서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친구들로부터 받았던 손편지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같이 놓여있었다.


반대편 벽에는 

이 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색깔의 육중한 금속 상자 하나가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그 옆 바닥에는 칙칙한 색상의 방탄조끼 하나가 놓여있었고,

저 너머 붙박이장 안에는 그의 재킷과 부츠, 

그리고 흑갈색 합성가죽 반코트가 들어있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낵시(Naxi)의 추억의 물품들과 함께 

자신의 장비를 보관하는 것이 늘 미안하고 창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루에 장비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수사관(Probator)의 봉급으로는 

최하층으로 내려간다 해도 

부엌에 마루, 위생실, 그리고 방 세 개가 딸린 집은 구하기 힘들었다. 


지다로프(Zidarov)는 금속 상자에 비밀번호를 넣고, 

쓰자으리나(Tzarina)를 꺼냈다.

그는 자동 권총을 점검한 뒤,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방탄복과 방탄판을 조정한 뒤, 그 위로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그가 턱까기(Jawsnapper)라 불리는 근접 무기를 손에 끼웠다.

네 손가락을 끼워 운용하는 철권(Knuckle duster)인 턱까기(Jawsnapper)는

광택이 반들반들 나는 강철로 제작된 무기로

타격시 충격장을 형성하도록 제작된 근접 무기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코트를 들어올려 권총집에 쓰자으리나(Tzarina)를 넣었다.


아직 밖은 어두웠다.

동이 트려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지나야 할 것이다.

그는 밀리자(Milija)를 떠올렸다.

그녀가 일하러 다시 도시로 출근할 때까지, 

그녀에겐 아직 한 시간 이상의 여유가 남아있었다.


'나도 그녀 옆에서 그때까지 함께 누워있을 수 있겠지.'

그는 유혹에 시달렸다.

'그녀 옆에 누워 그녀와 함께 한 시간 정도 더 잘 수도 있을거야.'


그러나 그는 생각을 실천하는 대신, 집 문앞에 서 있었다.

그가 머무는 거주구역의 다른 가구들이 그렇듯이

집 밖으로 나가 공용구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똑같이 생긴 여러 개의 방탄문을 거쳐야 했다.

그는 묵묵히 엘레베이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위장은 항의하는 것처럼 뒤틀리며 쓰렸고,

전신의 근육은 쑤시고 아파왔다.

그리고 오래된 상처가 간지러웠다.



3 장에서 계속…





역자 주: 

※ 쓰자으리나(Tzarina) - 과거 제정 러시아의 황후를 지칭하는 단어





2020 년도 8월쯤에 개인적으로 지인들과 보기 위해 번역한 무수정 1 쇄입니다. 

엄청난 오역과 의역이 들어 있으므로 

원문을 읽으실 수 있는 분은 원문으로 읽으시기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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