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흐서킨(Kasrkin) 1부 1장
무려 100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황제는 지구에 있는 황금 옥좌에 무력하게 앉아있다.
그는 인류의 주인이었으며,
그를 섬기는 무궁무진하고 강력한 황제의 군대는
백만여개의 행성에서 어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부패한 송장이나 다름없는 신세라지만,
제국의 썩어가는 시체 군주는
기술의 암흑기에서 살아남은 놀라운 지식과
하루에서 수천명이나 되는 순수한 영혼의 희생으로
아직도 가늘게나마 그 생명줄을 영위한다.
이시대에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건,
밤하늘에 퍼진 별만큼이나 셀 수 없이 많은 수많은 소시민들 중,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제도하에서 산다는 것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대학살과 살육의 아수라장에서 산다는 것이다.
아마도 극심한 고통과 슬픔에 잠겨 비명을 지르겠지만,
어둠의 신들의 굶주린 웃음소리에 묻혀,
네깟것의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작은 위안이나 희망조차 찾기 어려운 작금은 말 그대로 끔찍한 암흑기다.
기술과 과학의 강력한 힘은 잊어라.
진보와 발전의 달콤한 약속은 잊어라.
인류애나 연민같은 나약한 감정은 잊어라.
아름답게 빛나는 저 별들 사이에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암울한 어둠이 지배하는 멀고 먼 미래, 그곳엔 오직 전쟁만이 존재한다.
제 1 부
빅 옐로우(Big Yellow)
제 1 장
"정말 커보이지 말입니다."
"네 생각보다 훨씬 크지."
"역시 뜨겁습니까?"
"르망 러스(Leman Russ) 표면에 그록스(Grox) 고기를 올려두면 바짝 구워질 정도로 뜨거워."
※그록스(Grox) : 워해머 40K에서 소처럼 사육되는 외계 생물체
"그럼 왜 기갑부대를 보내지 않는겁니까?"
"듣자하니 벌써 시도해 봤대,
하지만 불과 1 마일(약 1.6킬로미터)도 나가지 못하고 가라앉는다며 난리였다는군."
샨 맬릭(Shaan Malick) 병장은 방탄모를 조절하며 답했다.
사실 그는 방탄모를 쓰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의자처럼 깔고 앉아 있었다.
사병(士兵) 토르구트 건저(Torgut Gunsur)는,
맬릭(Malick) 병장의 바로 옆에 앉아,
발키리(Valkyrie) 수송선의 뭉툭한 날개가 만들어낸,
귀하디 귀한 그늘이 주는 사치를 병장과 함께 만끽하는 중이었다.
날카로운 태양빛이 찌르는 듯이 비추는 바람에
건저(Gunsur)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온통 노란색이지 말입니다."
맬릭(Malick) 병장은 건저(Gunsur)의 말에 웃었다.
"거대한 모래 바다(Great Sand Sea)지.
이름만 들어도 여기가 어딘지 감이 팍 오잖냐."
건저(Gunsur)는 재호흡기(再呼吸器; Rebreather)의 한쪽 조임쇠를 풀고 침을 뱉었다.
그의 침은 멋드러진 호를 그리며 그늘에서 벗어나 달궈진 모래 위에 떨어졌다.
침방울은 모래 바닥에 닿자마자 지글거리며 증발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맬릭(Malick)은 고개를 저으며 아깝다는 듯이 말했다.
"침 뱉지 마라.
그것도 물이라고 아쉬워지는 수가 있다."
"전 임무를 시작할 때면 꼭 바닥에 침을 뱉지 말입니다.
제 나름대로의 액막이 비법입니다."
맬릭(Malick)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건저(Gunsur)를 쳐다보았다.
"뭐라?"
"여기는 케이디아(Cadia)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 제 고향땅이 아닌 곳에서 싸우게 되면 면저 바닥에 침을 뱉습니다."
맬릭(Malick)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에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특별하게 눈에 띄는 건 없었다.
건저(Gunsur)는 괜스레 뭔가 켕기는 듯한 표정으로 병장의 표정을 살폈다.
"아, 그게 저, 그렇게 이상해 보이십니까?
하지만 맬릭(Malick) 병장은 돌아보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에 걸려있는 플라스틱강(鋼)[Plasteel]으로 만들어진 작은 물병을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플라스틱강 물병 표면은
이 케이디아(Cadia)인이 엄지와 검지로 닳도록 문지르는 통에
방금 광을 낸 금속 표면처럼 반들반들 광택이 났다.
두 사람은 캐흐서킨(Kasrkin) 소대를 이곳으로 데려온,
세 대의 발키리(Valkyrie)들 중,
한 대가 착륙하면서 모래를 밀어내서 생긴 구덩이에 앉아,
발키리(Valkyrie) 날개 그늘 속에서 유유히 환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갑자기 맬릭(Malick)이 앞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모두 노란게 아니야.
노란 모래들 사이에 갈색이 일부 섞여있다.
거리를 두고 보면 간혹 흰색으로 변하는 뭔가가 있어."
"아지랑이가 어른대는 수평선 끝자락 말씀이십니까?"
맬릭(Malick) 병장은 건저(Gunsur)의 무심한 말에 박장대소가 터져나와,
웃다가 그만 사래가 들려 기침까지 하고 말았다.
"옥좌시여.
아 이렇게 웃으면 안되는데.
여긴 공기마져 뜨겁군."
"이 빌어먹을 행성에선 모든 게 뜨겁습니다."
맬릭(Malick)은 몸을 돌려 건저(Gunsur)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병사, 지금 사병 주제에 이곳에 있기 싫다고 말하는 건가?
그건 반역죄다."
건저(Gunsur)는 갑자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자신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놀리시는 겁니까, 맬릭(Malick) 병장님?"
맬릭(Malick)이 미처 대꾸를 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지금 그 병사를 데리고 노는 건가, 맬릭(Malick) 병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케이디아(Cadia)인은 번개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느슨했던 주변은
두 병사의 군화발이 모래를 짓밟고 일어서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변모해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맬릭(Malick) 병장은 재빠르게 그들의 눈 앞에 서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살폈다.
그가 입고있는 제복에는 계급을 나타내는 표시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서있는 상대에게선 어쩐지 고위급 장교의 느낌이 났다.
맬릭(Malick)은 짬밥에서 우러나는 경험에 따라,
안전하게 상황을 타개하기로 결정했다.
"예, 하급병사를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각하."
목소리의 주인공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개인적으로 장난이었길 바랬네.
그건 소대를 이끄는 지휘관이 재치와 유머감각이 있다는 뜻이거든."
맬릭(Malick)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멀뚱거렸다.
"저, 각하?"
"다른 소대원들을 집합시키도록."
맬릭(Malick)은 상대의 명령을 수행하기에 앞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신원 확인을 요청했다.
"외람되오나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각하."
"바라트 오베이세케라(Bharath Obeysekera)"
따가운 햇살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남자는
강렬한 태양이 비추어 보이는 커다란 눈으로
맬릭(Malick)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라트 오베이세케라(Bharath Obeysekera) 대위다.
자네들은 모두, 징벌의 일환으로 내 휘하로 재배치되었다.
알았으면 이제, 병사들을 집합시키게."
"알겠습니다, 각하."
직속 상관으로부터 직접 받은 명령을 즉각 수행하기 전,
맬릭(Malick)은 손을 가슴에 붙이고 쌍두독수리(Aquila) 문양을 만들어 존경을 표한 뒤,
즉시 돌아서서 명령을 복창했다.
"전원 집합!"
병장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소대원들에게 집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는
사막의 나대지 위에서 더운 공기를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러자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는
목에 핏발이 잔뜩 선 맬릭(Malick) 병장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는
병장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이번 임무에선 비닉(祕匿) 유지가 핵심이다.
정숙을 유지하며 무선 통신(Vox-channel)을 활용하도록.
우선 당장, 자네부터 조용해졌으면 좋겠군, 맬릭(Malick) 병장."
"넷…"
맬릭(Malick)은 반사적으로 답변을 내지르다가 멈칫했다.
"각하,"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복창을 마무리했다.
"잘했네 병장."
오베이세케라(Obeysekera)가 말을 이었다.
"대원들 전원을 그늘 밑으로 집합시키게,
잠시 후부터는 햇볕을 원없이 마주하게 될테니 말이야.
아으루나(Aruna) 대령님께서 먼저 간략한 임무 개요를 말씀해 주실거다.
그리고 내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하도록 하지."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발키리(Valkyrie) 날개 그늘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대위는 맨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래 위에서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맬릭(Malick) 병장은 방탄모를 집어 소대원들과의 직통 무선 채널을 열었다.
병장은 다른 일곱 명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위치로 무언(無言) 집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병장의 탐지기(Auspex)에 전원으로부터 즉시 명령 확인 신호가 들어왔다.
그리고 탐지기(Auspex) 상에 집결지로 설정한 위치로
다른 병사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작은 광점으로 표시되었다.
발키리(Valkyrie)가 착륙한 직후,
사주경계를 위해 맬릭(Malick)이 외곽 감시를 맡겼던 병사들이
다시 중심부로 모여들고 있었다.
건저(Gunsur)는 병사들의 집결 상황을 확인중인 맬릭(Malick)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기울였다.
"전 저런 식으로 차려입은 대위는 딱 한 번밖에 본적 없지 말입니다.
반란군으로 떨어져 구역 배신자놈들을 지휘하던 전직 대위놈이
교수대에 매달리기 전에
교수대에서 사형집행관들의 손에 제복과 휘장을 빼았겨,
가슴팍이 훤히 드러냈을 때 말입니다.
병장님 저사람 저거 진짜 대위 맞습니까?"
"어, 너 못봤냐?"
"뭐 말이십니까?"
"아까 안으로 들어갈 때,
저분 목에 독수리 표식 있는 거 말이야.
저분 찐('kin)이야, 대위님이 맞아.
게다가 예전에 저분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도 있고 말이지."
※ 찐('kin) = 캐흐서킨('kin);
캐흐서킨(Kasrkin) 소대원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단어인 캐흐서킨(Kasrkin)의 맨 뒷쪽부분,
킨(kin)만 짤라서 자신들과 동류(Kin) 전사라는 뜻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일종의 은어.
본 번역에서는 일부 상황에서 진짜의 줄임말인 찐('kin)으로 번역.
"에엑?
어디서 말입니까?"
"샌도(Sando) 후퇴때 말이지.
저 대위님과 예하 캐흐서킨('kin)들이
후퇴가 완료될 때까지 타이라니드('nid) 공세를 막아내야 했는데,
그때도 퇴출 지점에서 수송 차량에 오를 때까지,
저런 민간인 복장으로 전장에서 직접 지휘했었다는데."
건저(Gunsur)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병장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십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대는 전멸했다지 아마, 저 대위 혼자만 살아서 나왔다더라구."
건저(Gunsur)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스타일의 장교님이다는 말씀, 명심하겠슴다."
맬릭(Malick)은 고개를 저었다.
"실상은 어떨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이 예쁜이를 결코 손에서 놓치 않을거야."
병장은 발키리(Valkyrie) 기체 옆면에 놓여있던 헬건(Hellgun)을 냉큼 집어들고는,
몇 해 묵은 꿀처럼 적갈색 빛깔을 띤
마닐카라 목재(Paluwood)로 만든 개머리판을 매만졌다.
개머리판은 오랜 시간동안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이 예쁜이는 수 킬로미터 밖에서 어떤 외계인의 머리에도 따끈한 구멍을 뚫어주지."
건저(Gunsur)가 사막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쪽에 퍼런 피부를 가진 생명체가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병장님?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인 할애비라도 이딴 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겁니다."
"놈들은 괴팍한 외계인 쓰레기들이니까,"
맬릭(Malick)은 덤덤하게 답했다.
"흥미를 가질지도 모르지.
게다가 내가 듣기론, 이 행성에 퍼렁이들 관심을 끌만한게 많다고 하던데."
"네, 여긴 모래가 있습니다."
건저(Gunsur)가 비꼬듯 말했다.
"엄청, 엄청 많은 모래 말입니다."
맬릭(Malick)은 건저(Gunsur)의 어깨에 손바닥을 강하게 올리고 꽉 움켜쥔 뒤,
조곤조곤 일러주었다.
"그 모래 아래에,
주변의 어떤 행성들이 가진 보물들보다도
훨씬 가치가 높은 무언가가 잠들어 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야…"
병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바짝 말라붙은 사막을 몸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쉬트 아이-케바아(Dasht i-Kevar)라고 하더군."
말을 마친 맬릭(Malick) 병장과 건저(Gunsur)는
고개를 돌려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를 바라보았다.
대위는 회색과 황갈색으로 이루어진 캐흐서킨(Kasrkin) 제복으로 환복한 채,
한 손엔 정장용 군모를 쥐고 발키리(Valkyrie) 경사로 맨 위에 서 있었다.
"먼저 아으루나(Aruna) 대령님께서,
제군들의 현지 배치 계획과 전략적 목표에 대해 말씀해 주실거다.
그리고 내가 전술적 상황에 대해 말해주지."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고고하게 서 있는 두 번째 발키리(Valkyrie)를 가리켰다.
"제군들도 대령님을 더 길게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겠지, 그렇지 않나?"
"물론입니다, 각하."
맬릭(Malick)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병장은 다시 탐지기(Auspex) 화면을 살폈다.
다른 소대원들은 설정된 집결지로 예정대로 모여들고 있었다.
셋은 발키리(Valkyrie) 날개 그림자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태양빛은 납덩이처럼 그들을 짓눌렀고,
어찌나 강렬한 압력이었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는 손에 들고있던 정장용 군모를 썼다.
"이 모자는 이럴때만 유용하다니까."
대위는 맬릭(Malick)과 건저(Gunsur)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철모는 기껏해야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지,
자네들도 군모를 쓰고 목 주변에 스카프를 두르는 편이 낫지 않겠나."
맬릭(Malick)은 고개를 저어 거부의 표시를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철모에 새겨진 여러 홈과 긁힌 자국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이 없었더라면 전 여기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재호흡기(再呼吸器; Rebreather)가 꼭 필요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임무를 완수하려면 아마도 수많은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임무를 수행할 장소까지 도착하지도 못한다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말을 마친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는 맬릭(Malick)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캐흐서 와산(Kasr Vasan) 출신이군.
듣자하니 케이디아(Cadia)에서도 가장 원활한 병참을 자랑하며,
물류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라지.
아마도 자넨, 임무에 필요하다면 뭐든지 원하는 대로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거야.
난 캐흐서 게쉬(Kasr Gesh) 출신이네.
우린 여분은 고사하고,
라즈소총(레이저 소총; Lasrifle)에 꽂을 탄창 하나만 있어도,
운 좋은 놈이란 소리를 들었지.
이번 임무에서 우린,
우리만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해.
일단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뭐든지 최대한 많이 챙겨가겠지만,
결국 뭔가가 떨어지면, 가지고 있는 걸로 임시변통해서 해결해야 하네.
그러다가 둘러맞추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면, 맨손으로라도 임무를 수행할 걸세.
난 제군들이 이런 상황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기를 기대하네.
혹시 그럴 수 없다면 지금 말하게,
보다 적응력이 있는 다른 대원들을 수배해야 하니 말이야.
내 말 이해하겠나?"
맬릭(Malick)은 고개를 돌려 당당하게 대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 단 한 번도 임무에서 실패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걸세, 병장.
자네의 기록을 보면 자네는 머리를 쓰고 생각을 할 수 있는 병사야.
그렇지 않나?"
맬릭(Malick)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넷,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병장은 건저(Gunsur)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건저(Gunsur) 역시 그런지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괜찮네 병장.
사병들 모두에게 상황을 헤아리고, 판단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지 않겠나?"
말을 마친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는
뜨겁게 달궈진 모래 위로 첫발을 힘차게 내딛었다
아까와 달리 정규군에게 지급되는 정식 군화를 신은 발걸음이었지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모래 속으로 조금씩 파묻히며 작은 구덩이를 남겼다.
맬릭(Malick)과 건저(Gunsur) 역시,
대위의 뒤를 따라 지휘관용 발키리(Valkyrie)로 향했다.
발키리(Valkyrie)의 터보팬 추진기가 착륙시 만들어낸 모래 구덩이에 도착하자,
셋은 분화구 정중앙에 바짝 웅크리고 있는 기체를 향해 조심스럽게 경사를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모래는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다들 지면과의 접지력이 좋은 군화를 신었지만,
모래가 워낙 물처럼 끊임없이 중앙을 향해 흘러내렸기에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처럼 분화구 중심부를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로부터 50 야드(약 45.7m)정도 거리에 위치한 발키리(Valkyrie)는
기체의 아래쪽 절반이 모래 속에 파묻혀있었다.
발키리(Valkyrie)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이 벌써 모여있었다.
삼각 대형으로 착륙한 세 대의 발키리(Valkyrie)들 중,
세 번째 꼭지점을 그린 발키리(Valkyrie)에서 내린 자들과
맬릭(Malick)이 외곽 감시를 맡겼던 병사들이었다.
집결한 병사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지만,
정작 한가운데 위치한 지휘관용 발키리(Valkyrie)는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터보팬 엔진이 부드럽게 돌아가면서 통풍구로 계속 공기를 순환시켜,
플라스틱강(鋼)[Plasteel] 이빨 사이에 계속 모래가 끼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하신 계령(械靈; Machine spirit)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 애쓰고 있었다.
조종사는 조종석에서 내려오지 않고 계속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짙은 검은색 고글때문에 그의 눈이 어디를 보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체에 장착된 중형 볼터(Heavy Bolter)는
텅 비어있는 삭막한 풍경을 겨누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대지는 아지랑이 속에 푹 잠겨있었기에 시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고작 반마일[약 800미터(m)]만 떨어져 있어도
풍경은 태양빛에 달아오른 공기 속에 용해되어 녹아내리듯 아롱거렸다
정말 기이할 정도로 평평한 지형이었다.
여러 사구(沙丘)들이 동쪽의 대사해(大沙海; Great Sand Sea) 끝자락까지
끊임없이 조용한 파형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늘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사막 서쪽에는
먼 옛날 바닷물이 증발한 뒤,
침전된 염분으로 뒤덮인 너럭바위와 돌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토양이 부족한 이곳에서는
원주형태로 땅에서 솟아나온 현무암 기둥들 사이로
기반암이 그대로 드러난 얕은 괘등들이 여럿 존재했다.
"그림자가 사라졌습니다,"
맬릭(Malick)이 투덜거렸다.
병장은 자신의 발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대체 어디로 갔답니까?"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가 병장의 말에 그만 웃었지만,
메마른 더위에 소성(笑聲)은 거친 소리로 변하더니 이내 짧게 끊어졌다.
대위는 머리 위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저기로 갔다네."
맬릭(Malick)이 눈을 가늘게 뜨고,
뒤통수가 목덜미에 닿을 때까지 고개를 젖히자,
보안경의 차광(遮光) 기능이 자동으로 작동해 눈을 보호했다.
병장의 머리 위에서는
다쉬트 아이-케바아(Dasht i-Kevar) 바로 위에 눌러앉은 태양이
지상을 노려보는 하얀 눈알처럼 무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맬릭(Malick)은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해가 안됩니다."
대위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영원히 이렇진 않을테니까."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대위도 태양빛을 이기지 못하고, 병장이 한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도 말이지."
대위는 맬릭(Malick)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림자가 없으면 거리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
거리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거의 다 왔으니 대령님을 더는 기다리게 하지 말자구."
캐흐서킨(Kasrkin) 병장의 눈에
말을 마친 오베이세케라(Obeysekera)의 피부 위로
땀 한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수분이 있었냐고 말하듯이
피부 위의 땀은 더는 흘러 내리지 못하고,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프로산(Prosan)보다 여기가 더 덥습니다."
병장이 다시 구시렁거렸다.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는 병장의 말에 그를 돌아보았다.
"프로산(Prosan)은 이런 날씨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일만 하지.
하지만 거기엔 다른 것돌도 있었잖나…"
대사해(Great Sand Sea)를 바라보는 대위의 눈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햇빛때문에 저절로 시선이 가늘어지듯
대위의 목소리도 말미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여기서는 놈들을 다시 만나지 않기만을 기원하세."
지휘관용 발키리(Valkyrie) 주변에는 벌써 다른 병사들이 거의 다 모여있었다.
맬릭(Malick)은 발키리(Valkyrie)의 주익 아래에
다른 소대원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주시했다.
몇몇은 그늘 속에서 그냥 모래 바닥 위에 쪼그려 앉아있었고,
또 몇몇은 방탄모를 의자처럼 깔고 앉아있었지만,
모두 한결같이
헬건(Hellgun)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고준위 라즈건(Hot shot lasgun)은
신줏단지 모시듯이 애지중지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제 막 외곽 감시에서 복귀해 걸어들어오는 중인 소대원들도
자신이 팔이 요람이라도 된 것처럼,
아기를 안듯 소중하게 헬건(Hellgun)을 파지하고 있었다.
맬릭(Malick)은 탐지기(Auspex) 화면을 흘긋 보았다.
소대원들 전원이 이곳에 모여있었다.
병장이 탐지기 화면에서 눈을 막 떼려는 순간,
정면에서 움직임이 느껴지는 바람에 병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런 병장의 눈에 발키리(Valkyrie)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고위급 장교 제복이 들어왔다.
아으루나(Aruna).
대령의 명성은 이 구역(Sector) 전체에 널리 퍼져있었다.
대령은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자주색 상흔이
밤하늘을 둘로 가르는 것을 기점으로
격분한 혼돈을 따르는 무리(Chaos Cultist)들이 소요의 수준을 넘어 대규모 반란,
아니, 사실상 내전에 가까운 사태를 일으켰던
크랙 데 췌이블(Krack des Chavel) 방어전을 진두에서 지휘했고,
지금까지 세 개의 성계(星界; System)를 불모지로 바꾼 오크(Ork) 전투단,
그래쉬배쉬 더 그래버(Grashbash the Grabbler)의 침공을 상대로
성공적인 방어전략을 계획한 인물이다.
또한 얼마 전에 시도되었던,
트'아우 제국(T’au Empire)의 감언이설과
외교적, 군사적 압박에 넘어가버린 제국의 하위구역(Subsector)을
평소처럼 무력으로 재점거하는 대신,
교묘한 책략을 통해 다시 제국령으로 복속시키려는 신규 계획은
그 입안 단계부터 아으루나(Aruna) 대령의 지략이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소문이
현지 제국군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다.
맬릭(Malick)의 경험에 따르면,
상대가 혼돈의 무리(Choas)건, 외계인(Xenos)건 간에
제국군이 적에게 빼았겼던 행성들을 다시 인류의 영토로 탈환하면,
승리를 거둔 후에도 다시 사람이 살만한 행성으로 바꾸고,
인구와 생산력을 회복할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근데 아으루나(Aruna)는
트'아우(T’au)놈들을 물리치고,
두 개의 행성을 제국령으로 회복시켰음에도
두 행성 모두,
즉시 독자 생존이 가능할 정도의 인구와 생산력을 온존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아으루나(Aruna) 대령은 위풍당당하게 경사로를 내려와,
캐흐서킨(Kasrkin) 소대원들이 모여있는 모래밭에 당당하게 멈춰섰다.
찐('kin)들은 전장에서 단련된 날카로운 눈매로
그런 대령의 일거수일투족을 핥듯이 주시하며 관찰한 뒤,
한 명씩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열을 갖추고 경례를 올렸다.
잠시 대령을 가늠해본 그들은 대령도 그들과 같은 전사라고 인정한 것이다.
즉, 대령 역시 그들처럼
광기에 가득찬 전장 한가운데서도 움찔거리며 물러서지 않는 병사이자,
숱하게 죽음을 마주하고도 살아나온데다가, 죽음에서 쉽게 눈을 돌리지 않는 병사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 폐하를 위한 임무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병사라고,
찐('kin)들이 직접 확인한 것이다.
모든 캐흐서킨(Kasrkin)들이 대령을 그들과 같은 전사라 인정하고 경례를 붙인걸 확인하자,
아으루나(Aruna)는 찐들의 경례에 경례로 화답했다.
대원들과 경례를 나눈 대령은 맨 앞줄의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를 바라보았다.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대원들을 바라보자,
찐('kin)들은 전원 침묵을 지키며 대워님의 말씀을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
"장군 한 명이 실종되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를 수색해 구조할 예정이다."
캐흐서킨(Kasrkin)들은 침묵 속에서 담담하게 새소식을 받아들였다.
대원들은 저마다,
임무를 받아들이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들은 대령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 인내할 수 있었다.
"동부 지역 부대장인 마토 이토예사(Mato Itoyesa) 장군이
발키리(Valkyrie)를 타고 사령부로 복귀하는 도중,
트'아우(T’au) 바라쿠다(Barracuda)들의 습격을 당했다.
장군의 전속 조종사는
외계인(Xenos)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 모래 폭풍을 향해 비행했다."
아으루나(Aruna) 대령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캐흐서킨(Kasrkin)들을 죽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모두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맬릭(Malick)의 눈에는 전원이 온몸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
이들 모두 대령이 말씀이 무얼 뜻하는 줄 알기 때문이었다.
일반 병사건, 캐흐서킨(Kasrkin)이건, 제국 해군이건 간에
다쉬트 아이-케바아(Dasht i-Kevar)에 배치되면,
배치 첫날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되풀이해 듣는 주의사항이 있다.
그건 절대!
의도적으로 이 행성의 모래 폭풍 속으로 향하지 말라는 것이다.
폭풍의 기세가 너무나 맹렬하기 때문에
제대로 보호되지 못한 병사라면 고작 몇 분만에 뼈에서 살이 발려나갈 정도였다.
발키리(Valkyrie)같은 수송선은 순식간에 엔진에 모래가 끼어 먹통이 되고,
계령(械靈; Machine spirit)마저 엄청난 양의 모래에 숨이 막혀 죽어갈 것이다.
막강한 르망 러스(Leman Russ)라면 잠시 동안은 버티겠지만,
금세 작은 틈새로 모래들이 쏟아져 들어와
톱니바퀴와 축받이 사이에 끼어들어 마모를 유발하고,
조금씩 갈려나가 결국 모래밭에 퍼지고 만다.
"최후의 통신에 따르면 장군이 탑승한 발키리(Valkyrie)는 지면에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불시착 지점이 사막 한가운데라 근사치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좌표를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토예사(Itoyesa) 장군을 구조하기 위해 우리도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마지막 통신 이후, 그 어떤 무선 교신이 없는 상태다.
동부 지역 지휘관이라 이미 언급했으니,
장군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며, 어째서 외계인(Xenos)의 손에 넘어가면 안되는 지를
제군들에게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대령은 다시 말을 멈추고, 주변의 캐흐서킨(Kasrkin)들을 둘러보았다
캐흐서킨(Kasrkin)은 침착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군이 확실하게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다.
질문있나?"
맬릭(Malick)은 주변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이번 임무와 관련해서 수많은 질문들이 병사들의 입속에서 맴돌터였다.
하지만 이들은 찐('kin)이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임무를 성공시키는 게 이들의 일이다.
병장 역시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답변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대원들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대령님 말씀 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장군님의 조종사는 왜 그때 모래 폭풍을 향해 비행했습니까?
군 총관(軍 摠管; Lord militant)께서 친히,
전 군에 금령을 내려 그런 행동을 금지하지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질문자는 적재 구획의 어두운 그늘에서 걸어나와,
발키리(Valkyrie) 주익 아래에 걸쳐있는 옅은 그늘로 이동했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앳된 얼굴을 한 젊은이였다.
그의 날렵한 몸매는 땀이 뚝뚝 떨어지는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영재원(Officio Prefectus) 출신 정치장교(Commissar)들이 착용하는 표준 제복인,
무릎을 덮는 긴 웃옷에 단단히 싸여 있었다.
아으루나(Aruna) 대령은 몸을 돌려 질문한 젊은이를 바라본 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가 해당 조종사를 구출해서,
그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된 뒤에
그에게 최우선적으로 물어볼 질문이군.
자네 아버지도
지금 자네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무척 궁금해하실거라 확신하네."
"저도 분명 그러실 거라 굳게 믿습니다.
로우샹트 총관(Lord Militant Roshant)께서는…
심복들 중 한 명이 실종되는 바람에 상심이 매우 크시답니다."
"우리 모두 그렇다네 로우샹트 정위(Commissar Roshant),"
아으루나(Aruna) 대령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대령이 정치장교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몸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로우샹트 정위(Commissar Roshant) 역시,
주변의 긴장된 분위기를 알아차렸지만,
짐짓 본인은 군중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허나 맬릭(Malick)에게는 그런 그의 행동이
살벌한 전장에서 오직 자기 혼자만,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절대 관통이 불가능하다는
굴절 방어막(Refractor field)에 싸여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은 것처럼
부모의 후광 덕에 제국에서 탄탄대로의 출셋길이 확보된 주제에
건방진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시덥잖은 금수저가 보여주는 거드름처럼 보였다.
캐흐서킨(Kasrkin) 병장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그런데 얼굴을 찡그리는 바람에 가늘어진 눈으로 다시 자세히 보니,
실제로도 정위가 굴절 방어막(Refractor field)을 착용하고 있다는 걸 시사하듯,
로우샹트 정위(Commissar Roshant) 주변에 미묘한 위상 굴절 효과가 흐릿하게 보였다.
"이게 바로,
제 아버지이신,
군 총관(Lord militant)께서,
제게 직접 대령님의 부하들과 합류해,
그들이 임무 수행을 감독하라는 이유입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말라보이는 정치장교는 이쯤에서 갑자기 말을 멈췄다.
정치장교의 농간이라면, 신물이 나게 봐온 캐흐서킨(Kasrkin)들은
이 새파란 정위가 자신의 아버지가 총관이라는 사실에
병사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대응은 고작해야 눈을 찌푸리거나,
정위의 얼굴을 슬쩍 살펴보거나 하는 등의 심드렁한 반응들 뿐이었다.
맬릭(Malick)은 정위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총관(Lord militant)의 아들이 그들의 임무에 합류하는 사실을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가 먼저 알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대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위의 폭탄 선언에도 불구하고,
대위는 폭풍이 지나간 사막 표면처럼 애매모호한 모습이었다.
마치 사나운 바람이 모래 표면을 박박 닦아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것처럼
대위의 무표정한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로우샹트 정위(Commissar Roshant)는
캐흐서킨(Kasrkin)들이 보여주는 반응에 충분히 만족한 듯,
아으루나(Aruna) 대령에게 몸을 돌렸다.
"우리가 장군님의 생존을 확인하고 구조한다면,
장군님이 적에게 협조한 사항이 있는 지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장군님의 사망을 확인한다고 해도,
똑같은 질문에 대한 확인이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장군님의 소재를 찾아내지 못할 경우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게, 더 시급한 문제로 부상하게 될 겁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이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절 보내신 겁니다."
아으루나(Aruna) 대령은 정위의 발언에 긍정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네, 정위.
하지만 군 총관(Lord militant)께서 추가적인 명령을 하달하시지 않으셨다면,
이번 임무의 지휘권은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에게 있음을 알아주길 바라네."
아으루나(Aruna) 대령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정위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도록 잠시 침묵했다.
"네, 그게 맞습니다."
로우샹트 정위(Commissar Roshant)의 입에서는
정위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을 증명하듯,
확실하지만 억지로 짜낸 듯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맬릭(Malick)은 겉으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총관이 이번 임무를 지휘하게 해달라는 아들의 간청을 끝끝내 거절하며
모른 체하는 장면을 상상하곤 남몰래 웃어댔다.
아으루나(Aruna) 대령은 정위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정위.
자, 그럼 오해가 없도록 다시 한번 확인하겠네,
자네는 이번 임무에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 최고 책임을 지는 정치장교로서 합류하지만,
임무 전반에 있어 책임을 지는 현장 총지휘관은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일세.
이를 분명하게 동의하는가?"
로우샹트 정위(Commissar Roshant)는
아으루나(Aruna) 대령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를 흘끗 쳐다보았다.
"네, 동의합니다."
정위의 가느다란 입술에서 마지못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아주 좋아,"
아으루나(Aruna) 대령이 만족한 듯 말을 이었다.
"임무를 시작하기 전, 업무 분장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게 되어 참 다행이네."
대령이 귀찮은 정치장교 문제를 해결했다는 듯 고개를 돌리려하자,
로우샹트(Roshant)는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듯이 쏘아붙였다.
"이번 임무의 지휘권이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에게 있는 건 맞습니다만,
군 총관(Lord militant)께서 이번 임무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모두 문서로 남기라고 한 것도 사실입니다.
전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가
신황 폐하의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임무에 파견한 정치장교인 제 조언을 따르지 않는 낌새라도 보이면,
모든 걸 문서로 남겨 상부에 보고할 생각입니다."
로우샹트(Roshant)는 말을 잠시 멈추고는
먼저 아으루나(Aruna)를, 그리고 뒤이어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를 노려보았다.
"이를 분명하게 동의하시죠?"
대령은 정치장교를 바라보며 말했다.
"완벽하게 동의하는 바이네."
로우샹트(Roshant)는 오베이세케라(Obeysekera)에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
"대위는?"
맬릭(Malick) 병장은 대위의 눈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살기를 볼 수 있었다.
발키리(Valkyrie) 주익 아래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분명하게 보이는 번득임이었다.
"이해합니다, 로우샹트 정위(Commissar Roshant),"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가 답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명랑한 표정을 지은 대위의 눈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임무에 대한 전체 보고서를 직접 작성해 주시겠다니,
제 입장에서는 사무적인 일에서 해방되어 오히려 반가울 정도인데요."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는 대령에게 몸을 돌렸다.
"자 이제 업무 분장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임무 개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대령님?"
"아 그래, 부탁하네."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래밭에 정렬한 대원들을 살폈다.
대위의 시선은 건저(Gunsur)의 제복 위에서 멈췄다.
"제군들의 제복에서 종군 기장과 캐흐서(Kasr) 인식표를 모두 제거한다.
난 제군들이 햇테스 제 2 행성 전역(Haetes Second Star campaign)에서 싸웠는지,
어느 캐흐서(Kasr) 출신인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내게 중요한건 제군들이 이제 제 155 연대 1 분대 소속이라는 거다.
하지만 사실, 난 그것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는 잠시 대기중인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내게 지금 중요한건 오직 이번 임무뿐이다."
말을 마친 대위는 잠자코 기다렸다.
먼저 한 명이, 그리고 두 명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이윽고 모든 대원들이 자신들의 종군기장을 제복에서 떼어내 호주머니에 넣었고,
캐흐서(Kasr) 인식표는 제거하거나 보이지 않게 가렸다.
마침내 전원이 모든 휘장을 제거하고 단순한 캐흐서킨(Kasrkin)이 되자,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고맙다.
우에이스(Uwais).
하(Ha).
프라터(Prater).
앙소르(Ensor).
체임(Cham).
쿠에릇트(Quert).
레으린(Lerin)."
맬릭(Malick)은 레으린(Lerin)의 이름이 호명되자,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중화기를 수족처럼 자유자재로 운용한다는 그녀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건저(Gunsur).
맬릭(Malick)."
자신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호명된 뒤에야,
맬릭(Malick)은 오베이세케라(Obeysekera) 대위가
소대원들 전원의 인적사항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위님."
병장은 점호에 대답했다.
점호를 마친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는 병사들에게 좀 더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제국 최강이라는 제군들은 이번 임무에서 그 기술을 극한까지 시험받게 될 것이다.
이번 임무는 단순히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행성 자체와 맞서 싸워야만 한다."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는 그늘 밖에 넓게 펼쳐진 모래를 가리켰다.
대위는 보이지 않는 다쉬트 아이-케바아(Dasht i-Kevar)의 모든 것을 안아
품 안에 가두려는 것처럼 허공에서 팔을 움직였다.
"이곳의 자연 환경을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모든 곳이 다 치명적인 환경이지만,
우리는 다쉬트 아이-케바아(Dasht i-Kevar)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바로 사해(Sand Sea) 말이다.
사해는 사람을 열기로 탈진시켜 죽인다.
사해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괴롭혀서 마모시켜 죽인다.
사해는 멍청한 자들을 쉽게 죽이고, 똑똑한 자들도 역시 손쉽게 죽인다.
우리가 이번 임무에서 살아남고,
성공적으로 임무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제군들은 지금까지 마주했던,
그 어떤 작전 환경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상황 속에서
아주 작은 변화라도 절대 놓치지 않는 세심함과
한시라도 한눈을 팔지 않고 임무에 열중하는 끝없는 집중력이 요구된다."
오베이세케라(Obeysekera)는 말을 마치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대위는 그의 소대원들을 한 명씩 다시 바라보았다.
발키리(Valkyrie) 주익 그늘 아래에서 캐흐서킨(Kasrkin)은 하나가 되어
초집중 상태로 대위의 얼굴을 주목하고 있었다.
대위는 미소를 지었다.
"제군들에게 보여 줄 게 있다."
대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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