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and Grey

 




틱, 틱, 틱.

그는 소음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이 소음은 냉각기가 열을 발산시키면서, 

플라스틱강(鋼)[Plasteel]이 수축할 때 나는 소리였다.


틱, 틱, 틱.

그는 예전에도 이 소음을 들어본 적이 있다.

전차병의 아들로 성장하면서 숱하게 들은 소음이었다.


그는 훈련병 시절에도 이 소음을 들었다.


늦은 밤, 

힘든 그날의 훈련이 끝난 뒤,

내일 새벽동이 트기 전에 다시 출격할 전차들이 오와 열을 맞춰 각을 잡고 정차하면,

멈춰선 엔진이 차갑게 식어 들어가면서, 

실린더 블록이 하루 종일 고되게 축적했던 열을 내뿜는 순간, 

지금과 똑같은 소음이 들렸다. 


틱… 틱… 틱….

소음은 점점 느려지면서 잦아들었다.

엔진은 이제 잔열을 거의 다 배출하고 충분히 식었다.


그는 소속 소대에게 

정차 후, 숙영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는지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새벽에 갑자기 잠을 깬 사람처럼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희뿌옇다…

그는 자신의 현재 위치가 어디였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시험 삼아 몸을 움직여 보았다.

갑작스런 격통이 그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전차 냉각기의 규칙적인 틱틱거림은 멈췄지만,

그의 전두엽에서 시작된 격통이 그 규칙적인 소음을 대체하듯 

단속적으로 신경절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격통에 질린 그는 감히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고통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는 고통의 근원인 앞머리를 짚으려 하였지만, 

그의 손은 앞머리를 짚을 수 없었다.

무언가 그의 손과 머리 사이를 막고 있었다.

그건 단단한 물체였지만 금속처럼 보이진 않았고,

잔잔하게 따뜻한 존재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게 뭔지 눈을 떠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

바로 그거였다.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

장전수.

르망 러스(Leman Russ) 주력 전차 상타 피데(Sancta Fide) 호 승무원,

알프하으르드(Alphard) 제 5 전차 연대, 제 3 소대 소속.


이제 그는 자신이 누군지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떠 주변을 확인할 마음도 아직 들지 않았다.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는 아직 시도할 수 있을 때,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온몸을 쥐고 흔드는 격통 때문에 시도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엔진이 식어가면서 잦아드는 소음을 대신하듯, 

주기적인 고통이 그의 머리에서 시작되어 온 몸으로 타고 흘렀다.

이제 엔진은 완전히 침묵했다.


스틸로(Stilo) 스스로도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성은 그가 눈을 떠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그의 의무였다.

그는 성간 우주군(Astra Militarum)의 병사였고,

알프하으르드(Alphard) 제 5 전차 연대 소속 전차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씀하셨다.


'황제 폐하께서 우리 모두를 보우하신다는 말씀은 사실이란다, 애야.

하지만 먼저 우리가 폐하의 기대에 화답해야 해.

폐하께서는 모든 인류가 자신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길 기대하신단다.'


스틸로(Stilo)는 눈을 떴다.

주변은 완전히 암흑 속에 잠겨있었다.

비록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눈을 뜨자 그의 다른 감각들도 말 그대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의 코에 르망 러스(Leman Russ)의 냄새가 사정없이 스며들었다.

목울대를 움켜쥐는 느낌의 고약한 인간의 체취,

벌레가 물어뜯는 것처럼 톡 쏘는 느낌의 주포 추진체의 산성 잔향,

중형 볼터(Heavy bolter) 특유의 유황 냄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프로메슘(Promethium)의 혹취(酷臭).

심지어 그는 입을 굳게 닫고 있었지만, 

혀끝으로 프로메슘(Promethium)의 특징적인 맛을 맛볼 수 있었다.


연료통이 파열된 것인가?


'황제 폐하는 우리 모두를 보우하신다, 하지만 먼저 폐하의 기대에 화답해야 한다.'


갑자기 이 문장이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크게 그의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바람에

스틸로(Stilo)는 누군가 전차 엔에서 자신에게 이 문장을 외친 게 아닌가, 돌아보았다.

하지만 조명이 나간 전차 안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기에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뭐라도 해보려고 한다면, 어떻게든 조명을 확보해야 했다.

스틸로(Stilo)는 암흑 속에서 여기저기를 더듬거렸다.

그는 어딘가에 있을 비상 조명을 손에 넣게 위해 버둥거렸다.


그의 손가락에 무언가가 닿았다.

그는 이전에 받은 훈련을 상기하면서, 

방금 손에 닿은 물건을 토대로 전차 내부를 연상해 보려 했지만,

무언가 상당히 이상했다.

전차 내부는 그의 생각보다 더 심하게 뒤틀려져 있었다.

잠시 혼란에 빠졌던 그는 곧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지금 모로 누운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틸로(Stilo)는 전차 내부가 90 도 기울어졌다는 가정 하에 

다시금 내부를 더듬었고, 마침내 대략적으로나마 내부를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저쪽은 관통탄 보관소였고, 이곳은 고폭탄 보관소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용한 탄피를 회수하는 활송 장치가 있었다.

그의 바로 왼쪽에는 비상시 전차 각부의 동력을 정지하는 스위치들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비상 정지 스위치 바로 아래에 비상시 사용되는 제어반이 만져졌다.


첫 번째는 이걸 누르고,

두 번째는 여기를,

그리고 세 번째로 저기를 함께 누른다.


스틸로(Stilo)는 조작을 마치고 스위치를 잡아당겼다.

마침내 전차 내 비상조명이 켜졌다.

비록 붉고, 흐리고, 껌벅이는 조명이었지만, 최소한 이제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온 건 전차장(戰車長)의 얼굴이었다.


"바으릇테즈코(Bartezko) 대위님?"


바으릇테즈코(Bartezko)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전띠에 매달린 그는 위아래가 뒤집힌 채로 스틸로(Stilo)의 머리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가림막이 파괴되는 바람에 전차장이 위치했던 장소가 그가 현재 위치한 곳에서도 훤히 보였다.

파워 소드(Power sword)가 그의 요대 한쪽에서 애처롭게 매달려 있었다.

바으릇테즈코(Bartezko)는 그 칼을 매우 좋아했다.

그건 마쳉고 균열(Machengo Rift)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을 치하하기 위해 

전차 군단 군단장이 직접 그에게 수여한 보검이었다.


"대위님?"


스틸로(Stilo)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대위의 얼굴이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도록,

바으릇테즈코(Bartezko)를 묶고 있는 안전띠를 뒤틀었다.

지상에 어떤 미련이 남았다 하더라도, 대위는 이제 더 이상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하리라.


"엠멧(Emmet), 반호프(Vanhof).

클리(Klee), 반 트히에넨(van Thienen)."


스틸로(Stilo)는 나머지 승무원의 이름을 외쳤다.


"황제시여 부디 이들이 화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지만 그가 외친 이름들은 무거운 공기 사이로 속절없이 삼켜졌다.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바으릇테즈코(Bartezko) 대위의 몸이 엉킨 전선들 사이에 매달려 있는 모습만 보였다.

스틸로(Stilo)는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하려 애썼다.


대위님이 안전띠를 묶고 직접 육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외치고 일어선 뒤,

포탑 출입문으로 다가가셨는데… 거기서.


그 부분부터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공중 폭발탄이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대위님이 출입문 잠금쇠를 열고 전차의 밀폐를 푸는 순간, 

오크(Ork)의 포탄이 지근거리에서 폭발했다.

그 폭압으로 바으릇테즈코(Bartezko)가 뒤로 튕겨져 나오는 바람에 포탑 출입문은 다시 닫혔지만,

밀폐된 차내에서 순식간에 기압이 변경되면서 승무원들이 무력화(즉사)된 것이다. 

스틸로(Stilo)만 빼고 말이지.


"제 3 소대 응답하라.

입감됐는가?

제 3 소대 들리나?"


목소리, 

스틸로(Stilo)가 기절 상태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들은 목소리는 가늘고 금속성 목소리로 

머나먼 곳에서 재잘대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무전기(Vox-panel)에서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대위의 시체를 밀치고 부서진 무전기 조작반(操作盤)으로 다가갔다.


" 삼 소대 입감했다. 이상."


"늦었잖나, 삼 소대.

당소가 귀소를 호출한지 벌써 거의 한 시간째다.

귀소 상황 보고하라."


스틸로(Stilo)는 무전기를 통해 목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상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무전기 조작반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스틸로(Stilo)는 우연히 자신의 귀를 만졌다.

귀를 만진 그의 손가락에 뭔가 따듯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만져졌다.

그의 양쪽 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중 폭발로 인한 압력 변화 때문이었다.


"여ㄱ… 여기는 삼 소대, 상타 피데(Sancta Fide) 호입니다, 각하.

저는 장전수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입니다 각하."


"바으릇테즈코(Bartezko) 대위를 바꾸도록, 이상."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각하.

대위님은 전사하셨습니다.

모든 승무원이 죽었습니다. 각하, 제가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갑자기 무전기(Vox)가 침묵에 빠졌다.

귀가 먹먹한 바람에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스틸로(Stilo)는 상대편 무전수에게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전차 군단 군단장께서 자네와 직접 통화하고 싶다고 하신다, 장전수 스틸로(Stilo)."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무전을 통해 들려왔다.

따듯하고 너그러운,

친절하고 부유한 삼촌같은 목소리였다.


"장전수 스틸로(Stilo)?"


"네-넷. 아버, 그러니까 각하."


"난 자네가 탐지기(Auspex)를 켜고, 주변을 살핀 뒤, 상황을 보고해 줬으면 하네." 


"탐지기(Auspex)는 모두 먹통입니다, 각하.

모든 게 다 나갔습니다.

연료통도 터졌습니다.

프로메슘(Promethium)이 제 발목까지 차 오른 상황입니다."


"스틸로(Stilo)."


커져만 가던 장전수의 심리적 불안 사이로 자신의 이름이 뚝 떨어져서 

마치 물 위에 떨어진 기름처럼 고요히 자리를 차지하고 멈춰 섰다.


"넷, 각하."


"무전기(Vox)가 작동하지 않는가.

탐지기(Auspex)를 켜보게.

자네는 전차병이야, 스틸로(Stilo).

전차병답게 행동하게."


"해-해보겠습니다."


스틸로(Stilo)는 탐지기(Auspex) 계기판으로 다가갔다.

탐지기(Auspex)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모든 화면이 검게 비어있었다.

그는 주저하다가 기계를 세게 내려쳤다.


"계령(械靈; Machine spirit)은 괴팍한 기질을 가진 생명체지,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얻어맞으면 다시 일을 잘하곤 해.

그럼 다시 전원을 넣어 보게나, 전차병."


스틸로(Stilo)는 탐지기(Auspex) 계기판 앞에서 기계를 다시 시작해 보려 했다.


"저- 저는 그게… 뭘 해야 할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각하."


"훈련을 떠올려보게 전차병."


스틸로(Stilo)는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때려보았다.


"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각하."


"이게 자네의 첫 번째 전선 정찰이지, 그렇지 루시우스(Lucius)?"


"그렇습니다."


"아무도 이런 시작을 바라진 않겠지만, 

자넨 아직 거기에 있네, 살아서 두 발을 디디고 서있지.

황제 폐하께서 자네를 보우하고 계신거야.

이제 폐하의 기대에 화답할 차례일세."


무전기(Vox)를 통해 들려오는 차분한 기도문을 듣고 있으니,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의 머릿 속에서 관련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는 훈련 받은 대로 계기반에 손을 뻗어 탐지기(Auspex) 재기동을 시작했다.

탐지기(Auspex)의 화면이 깜박이더니 다시 불이 들어왔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각하."


"잘했다, 잘했어."


"크읏! 하지만 화면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탐지기(Auspex)의 탐지 장비가 망가졌나 보군.

장전수 스틸로(Stilo), 난 자네가 직접 육안으로 주변을 관측하고 보고하길 바라네."


"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각하."


스틸로(Stilo)는 종료 후 재기동 명령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럴 시간이 없네.

난 지금 당장 상황 보고가 필요해.

지금 당장 말이네, 전차병.

잊지 말게나, 황제께서는 자네에게 기대하고 계셔."


"네-네에, ㅇ…."


"'네. 각하.'겠지"


"죄송합니다, 각하. 

네, 각하."


스틸로(Stilo)는 안전띠에 매달려서 흔들리는 바으릇테즈코(Bartezko) 대위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화상 상처가 대위의 얼굴 전반을 덮고 있었고,

살이 타들어가는 바람에 돌출된 뼈가 얼굴을 가로지르는 하얀 선처럼 돌출되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파워 소드(Power sword)는 그의 옆구리에서 무의미하게 되롱거렸다.


살아 숨 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장전수도 생명이 꺼진 인체를 함부로 밀치고 더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물리적인 거부감과 본능적인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포탑 출입구로 올라가 밖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안전띠를 풀고 대위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대위님."


스틸로(Stilo)는 안전띠의 잠금쇠를 풀었다.

바으릇테즈코(Bartezko)의 시체가 그의 앞으로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스틸로(Stilo)는 엉겁결에 시체를 덥석 껴안았다.

무전기(Vox)가 전체 통화 상태로 놓여있었기에

스틸로(Stilo)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애쓰면서 시체를 옆으로 천천히 내려놓았다.

대위의 시체가 대자로 넘어지면서 주포 약실부위에 걸치는 바람에

대위는 죽은 물고기처럼 포미에 걸쳐진 상태로 널브러졌다.

바으릇테즈코(Bartezko)의 시체는 아주 천천히 고부라지더니,

포미에서 떨어져 나와 피와 프로메슘(Promethium)이 전차 바닥에 만든 웅덩이 속으로 빠져버렸다.

방해물이 모두 없어지자, 스틸로(Stilo)는 포탑 출입구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카가가각, 가가가가각.


작은 소음이 밖에서 들렸다.

이건 분명 출입구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포탑 출입구 개폐기를 향하던 스틸로(Stilo)의 손이 얼어붙었다.


카가가가가각, 기기기기긱.


분명 뭔가 저 밖에 있었다.

긴 손톱으로 유리를 할퀴거나, 

칼로 플라스틱강(Plasteel) 표면을 긁을 때 나는 소음과 비슷한 소리가 계속 들렸다.

무언가가 날카로운 물건으로 차체를 계속 긁어대고 있었다.

스틸로(Stilo)는 어중간하게 잠겨있던 개폐기를 돌려 출입구를 완전히 밀폐했다.


쾅, 쾅, 쾅.


갑작스레 닥쳐온 충격이 너무나 커서 스틸로(Stilo)는 이빨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이건 원거리 사격이 전차 장갑에 맞아 튀겨나가는 소리가 아니었다.


쾅. 

쾅, 쾅.


뭔가 전차 표면에 붙어 직접 두들기고 있었다.

뭔가가 망치나 돌덩이를 들고 바로 옆에서 전차를 계속 때려댔다.


"루시우스(Lucius), 무슨 일인가?

상황을 보고하게, 루시우스(Lucius)."


스틸로(Stilo)는 재빨리 무전기 조작반에 다가가서 스피커 음량을 줄였다.


"뭐-뭔가가 밖에 있습니다,"

그는 거의 흐느끼다시피 말했다.


"그게 전차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각하, 제발 절 여기서 꺼내주십시오."


"걱정 말게, 스틸로(Stilo).

잠깐만 기다리게."


전차 밖에서 들리는 소음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군단장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탐지기(Auspex)를 다시 재기동해보도록 하게."


"저-저는 밖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쾅, 쾅, 쾅.


"탐지기(Auspex)를 재기동하게, 전차병!"


스틸로(Stilo)는 상타 피데(Sancta Fide) 호의 계령(Machine spirit)이 정신을 차리도록,

짧은 기도문을 읊조리고는 재기동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계령님이 입은 손상이 그가 입은 피해보다 더 컸으리라.


화면들에 다시 불이 켜지는 동안 두들김은 더 심해졌다.

이제는 얼추 어림잡아도 두들기는 곳이 최소한 두 곳 이상이었다.

하나가 주포 근처에서 쿵쾅거리면,

그 잠깐의 고요 사이에 두 번째가 측면 장갑을 두들겼다.


불행 중 다행인지 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탐지기의 화면이 껌벅이더니 영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령이 천천히 단속적으로 번쩍이던 화소들을 한데 모으는가 싶더니, 

붉은 색만 나오던 화면에 외부 영상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마침내 선명한 화면이 잡혔다.

스틸로(Stilo)의 눈에 황량하고 먼지가 잔뜩 낀 황무지가 들어왔다.


칼레바(Calleva)

이제야 그의 기억 속에 이 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은 황제 폐하께도 버림받은 이 행성의 이름이었다.


주변에 연기를 내며 쓰러져있는 다른 두 대의 르망 러스(Leman Russ)가 보였다.

결국 그가 소속된 소대의 전차들은 모두 퇴출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주변 지형은 수많은 폭발로 인해 달 표면처럼 여기저기 구덩이가 가득 패여 있었다.

이번에는 오크(Ork) 포병놈들도 어떻게든 유효타를 내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저 멀리, 

물 대신 마그마가 빠르게 흘러 대륙의 심연이라 불리는 가파른 계곡 절벽에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걸려있는 아치형 구조물인 

인피니티(Infinity) 대교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스틸로(Stilo)는 그 광경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아직 저 다리가 멀쩡하게 남아있다니 이상했다.


그의 소대는 이곳에서 아군 공병대가 다리에 폭탄을 설치할 때까지 적을 막아내다가 

폭파하기 직전, 다리를 건너 퇴출 지점으로 향하라고 명령받았다.

어쩌면 기폭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애초에 공병대들이 다리까지 무사히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그에게 그 원인을 분석하는 건 일종의 사치였다.


쾅, 쾅, 쾅.


아직도 그는 지금 뭐가 전차를 두들기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스틸로(Stilo)는 외부 카메라를 돌려 공격자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지만,

외부 카메라는 고정된 채, 아무리 조작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상타 피데(Sancta Fide) 호를 공격한 무기가 무엇이던 간에, 

외부 카메라 모터도 망가뜨린 것이 분명했다.

사실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장비만 가지고, 

약간이나마 바깥 상황을 알 수 있었던 것도 황제 폐하의 은총 덕이었다.


"보고하게, 스틸로(Stilo)."


"보-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갑자기 얼굴 하나가 카메라 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더니 스틸로(Stilo)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 얼굴이 거대한 입을 열었다.

그 얼굴에서 곰팡이 종족 특유의 녹색을 띄지 않는 건, 이빨과 혓바닥뿐이었다. 

입을 여는가 싶던 그 놈은 그대로 카메라를 물어뜯었다.

카메라가 뜯겨나가자, 

탐지기는 순식간에 먹통이 되었고,

루시우스(Lucius)는 자신도 모르게 화면으로부터 뒤로 홱 물러섰다.


"오크(Ork)다."


그는 무전기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상타 피데(Sancta Fide) 호 밖에 있는 건 오크(Ork)입니다.

이놈들이 우리 전차를 마구 두들기고, 제멋대로 물어뜯고 있어요."


"오크(Ork)놈들은 살인만큼이나 약탈에 유능한 부라퀴들이지,"


군단장은 짐짓 남의 일인 것처럼 말했다.


"상타 피데(Sancta Fide)를 외부로부터 완전히 밀폐했습니다, 각하.

안에까지 들어올 순 없을 겁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 전차병.

그거 말고 뭔가 더 알아낸 것 없나?"


"더요?

네 알겠습니다, 각하.

다른 영상을 수신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참 아까 외부 영상이 아직 들어올 때 봤지만,

주변 평원은 깨끗합니다, 각하.

오크(Ork)도 전차 안으로 들어오려는 한 놈만 보였습니다.

놀랍지만 이놈들은 다리로 향할 생각이 없나 봅니다."


"뭐라고?

방금 뭐라 말했나, 스틸로(Stilo)."


"그게, 다른 영상을 수신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아니, 아니.

그것 말고 다리 말일세.

다리가 아직 그대로 건재한가?


"넷, 각하.

아직 건재합니다."


"잠깐 대기하게, 전차병."


갑자기 무전기(Vox)가 침묵했다.

하지만 전차 밖은 달랐다.

스틸로(Stilo)의 귀에 전차 밖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나게 많은 움직임이.

그는 탐지기(Auspex)의 여러 스위치를 눌러보며 전선과 씨름했다.

그의 노력 덕인지 외부 화면이 천천히 다시 들어왔다.


"밖에… 밖에 수많은 놈들이 절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는 무전기(Vox)에 속삭였다.


"수백 마리가 넘습니다.

여기서 쥐죽은 듯 조용히 있으면, 이놈들이 절 버리고 떠날 것 같습니다."


"확인했다. 다리가 파괴되지 않은 것이 맞군."


"네?"


"장전수 스틸로(Stilo), 다리를 육안으로 확인하길 바란다.

아직 건재한가?"


쾅, 쾅, 쾅.


스틸로(Stilo)가 측면 감지기를 조작하기 위해 움직이자, 

외부에서 두드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스틸로(Stilo), 확인 바란다."


"확인했습니다, 각하.

다리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군단장 측 무전기가 침묵했다.

스틸로(Stilo)에게도 군단장 쪽이 얼마나 큰 충격에 빠졌는지가 느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내용이 잘 들리진 않았지만, 

군단장이 누군가에게 급하게 명령을 하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쾅, 쾅, 쾅.


"옥좌시여, 저를 보우하소서.

각하, 저들이 계속 들어오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틸로(Stilo), 내말 잘 듣게.

다리로 향하고 있는 오크(Ork)는 없는가?"


쾅, 쾅, 쾅.


이들은 이제 우측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젠 누군가 플라스틱강(Plasteel)을 한 겹씩 벗겨내는지,

전차 외피가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삐걱대기 시작했다.


스틸로(Stilo)는 외부 카메라 영상을 흘긋 보았다.

인피니티(Infinity) 다리로 향하는 드넓은 대지가 보였다.

장애물이라곤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개활지에는 먼지만 가득했다.


"없습니다, 각하."


"좋아, 알겠다."


쾅, 쾅, 쾅.


"저놈들이 계속 들어오려고 합니다, 각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발 어떻게 할지 지시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자네가 해온 훈련을 떠올려 보도록,

지금 발키리(Valkyrie) 편대가 귀소로 향하는 중이다, 전차병.

황제 폐하께서 자네를 보우하시길, 이상."


쾅, 쾅, 쾅.


"여기까지 오시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스틸로(Stilo)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측면 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측면의 플라스틱강(Plasteel)은 억지로 구부러지고 접혀진 채로 층층이 벗겨지고 있었고, 

제일 바깥쪽부터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화선지처럼 힘없이 날리고 있었다.


"놈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상타 피데(Sancta Fide) 호를 찢어발길 기세입니다."


"다른 놈들이 주변에 있나, 전차병?

그놈들이 모두 자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나?"


스틸로(Stilo)는 못 박힌 듯이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놈들은 측면 포탑에 고정된 중형 볼터(Heavy bolter)를 뽑아내려 하고 있었다.

중형 볼터(Heavy bolter) 총신이 엔진 피스톤처럼 앞뒤로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시우스(Lucius)!"


스틸로(Stilo)는 점점 강하게 움직이는 중형 볼터(Heavy bolter) 총신에서 힘겹게 눈을 떼고, 

다른 외부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녹피족(綠皮族; Greenskin) 폭주족 놈들이 

전차 주변으로 매연을 자욱하게 뿜는 워바이크(Warbike)와 워버기(Warbuggy)들를 끌고 들어와서,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플라스틱강(Plasteel)이 너무 많이 벗겨지는 바람에 

이 폭주족 놈들의 엔진 소음이 그의 귓가에서 들리는 것처럼 잘 들려왔다.


"놈들이 지금 출발하려 합니다, 각하.

놈들이 출발합니다!"


스틸로(Stilo)의 머릿속에 훈련에서 배웠던 방위각이 떠올랐다.


"2-6-5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오크(Ork) 놈들은 다리로 향하고 있었다.

저 다리는 오크(Ork)들에게 있어, 

더 많은 세상과 이놈들을 직접 이어줄 중요한 전리품이었고, 

아군 지휘부에게는 전술적 악몽이자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런 계산 따위가 어떻던, 

그는 여기서 죽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장전수 스틸로(Stilo), 사격을 개시하라."


스틸로(Stilo)는 무전기(Vox)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틸로(Stilo), 들리는가?

사격 개시."


그는 다시 외부 카메라 영상을 바라보았다.

워바이크(Warbike) 무리들 일부는 벌써 다리를 향해 달려 나간 상태였다. 


"스틸로(Stilo), 이건 명령이다.

사격 개시."


"하-하지만 전 놈들이 이대로 떠나가길 바랍니다, 각하."


"사격을 개시해, 스틸로(Stilo)!

발키리(Valkyrie) 편대가 귀소로 향하는 중이다.

귀소에 거의 도달한 상황이야.

하지만 자네가 사격을 개시하지 않으면 귀소의 위치를 특정할 수가 없다."


"저놈들은 흥미를 잃고 여기서 떠나가고 있습니다, 각하.

이제 와서 저들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습니다."


"더 많은 놈들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지금 당장 사격을 개시해.

지금이라면 놈들의 뒤를 잡을 수 있어.

발키리(Valkyrie) 편대가 나머지 놈들을 소탕하고 자넬 거기서 퇴출시킬 거야.

지금 자네에게 거의 도착했어."


"도착 예정 시간(ETA)은 몇 분 남았습니까, 각하?


"대략 십 분이다, 전차병.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십 분만 버티면 된다.

자 이제, 사격을 개시해.

적의 워바이크(Warbike)는 경장갑 차량이니 고폭탄을 사용하도록."


스틸로(Stilo)는 화면을 통해 

시커먼 매연을 뿜으면서 거칠 것 없이 대지를 질주하는 오크(Ork) 선발대를 바라보았다.


군단장님의 말씀은 사실이었다.

지금이라면 워바이크(Warbike)와 워트라이크(Wartrike), 

그리고 워버기(Warbuggy)들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먼지만 가득한 개활지에 오크(Ork)가 숨을 곳은 없었다.

이들은 분명 먹음직스러운 먹이였다.

하지만 동물적 생존본능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스틸로(Stilo)는 전차 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시체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이건 명령이다, 스틸로(Stilo)."


군단장의 말이 루시우스(Lucius)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무언가를 깨웠다.

그 덕에 그는 동물적 본능마저 이겨내고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계속해서 똑같은 훈련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해왔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한 번 시작된 심박동이 여간해서는 절대로 멈추지 않듯이

오랜 시간에 걸쳐 훈련된 동작은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주포를 장전합니다, 각하."


"좋아, 제군.

아주 좋아."


"가-캄사합니다, 각하."


"교본대로만 하면 된다, 아들아.

교본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스틸로(Stilo)는 고폭탄 보관소의 뚜껑을 열고, 고폭탄 하나를 힘겹게 집어 들었다.

그는 보관소의 뚜껑을 닫고 나서, 포미에 고폭탄을 넣고, 약실을 폐쇄했다.

그는 훌륭한 장전수였기에 포탄 장전은 식은 죽 먹기였다.

평소 훈련에서 그는 9 초 4 나, 9 초 5 에 한 발씩 장전했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전차병 훈련 기간 동안 그는 꾸준히 장전수 훈련을 받았다.

포수나 운전수 특화 교육은 받지 않았으며,

일과 종료 직전이나 짬짬이, 말 그대로 아주 가끔, 

부수 교육으로 사격과 운전법을 맛보기로 이수했을 뿐이었다.


"수동으로 목표를 조준해야 한다, 전차병."


"넷, 각하."


스틸로(Stilo)는 주포 조준경으로 목표를 확인했다.

주포는 목표에서 30 도나 틀어져 있었다.

스틸로(Stilo)는 선회용 손잡이를 힘차게 돌리기 시작했다.

포탑은 신음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갔다.


"1 도 횡전에 3 회전, 1 도 횡전에 3 회전,"


스틸로(Stilo)는 주문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잡이를 계속 돌렸다.

그런 그의 등 뒤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천천히, 포탑은 방향을 틀었다.


스틸로(Stilo)는 조준경으로 다시 목표를 확인했다.

이제 방향은 얼추 맞았다.


오크(Ork)들은 엄청난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황무지를 건너 다리로 향하고 있었다.


추가로 5 도 더 선회해야 했다.

15 회전이 더 필요했다.


그는 입으로 회전수를 하나하나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 넷, 셋, 둘, 하나."


스틸로(Stilo)는 조준경으로 다시 목표를 확인했다.

조준경의 십자선이 자욱한 먼지구름 선두 중간쯤에 걸쳐 있었다.

그는 탐지기(Auspex)의 탐지 방식을 복사열을 감지하는 적외선 탐지 방식으로 바꿨다.

그러자 먼지 구름 덩어리가 화면상에서 붉게 바뀌었다.


"상향, 상향,"


그는 앙각을 조절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2 도 상향합니다."


스틸로(Stilo)는 앙각 조절기를 붙잡고 빠르게 돌렸다.

한 바퀴 돌릴 때마다 입으로 숫자를 여섯까지 센 뒤 다시 조준경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조준선은 붉은 덩어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틸로(Stilo)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발사 손잡이를 밀었다.


"발사."


반동으로 주퇴복좌기(駐退復座機)가 후퇴했다 돌아가면서 차체가 진동했다.

공기 중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던 목을 간지럽히는 추진체 기화 가스가

갑작스런 주포의 움직임에 놀란 듯, 주변을 소용돌이쳤다. 


스틸로(Stilo)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혹독한 훈련이 다시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스틸로(Stilo)는 물 흐르듯이 깔끔한 동작으로 

주포 폐쇄기를 열어 타고 남은 탄피가 튀어나와 탄피 회수기로 떨어지게 놔두었다.

그리고 동시에 탄약고를 열어 고폭탄을 꺼내고, 

뚜껑을 닫으면서 포미에 탄을 장전하고 약실을 폐쇄했다.


스틸로(Stilo)는 조준경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붉게 빛나는 먼지구름은 움직임을 멈췄지만,

중심부는 타들어가듯 꿈틀대며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고,

조준경 십자선은 바로 그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발사."


그는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자각도 없이 홀로 중얼대고 발사했다.

고막이 터져버렸는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발사 또 발사.


그는 생각할 새도 없이 훈련에 따라 몸이 기억하는 대로 계속 움직였다.


장전, 조준, 발사.

장전, 조준, 발사.

장전, 조준, 발사.


스틸로(Stilo)는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무전기(Vox)에서는 호출음이 계속 들리고 있었지만, 

그는 호출을 무시하고, 탐지기(Auspex) 영상부터 확인했다.


화면은 완전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방금 전까지 얼마나 많은 고폭탄을 먼지 구름에 뿌렸는지는 

오직 전능하신 황제 폐하만이 아실 터였다.

그는 탐지기(Auspex) 탐지 방식을 다시 변경했다.

화면상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무전기(Vox)가 다시 꽥꽥대며 비명을 질렀다.


"스틸로(Stilo).

현재 상황을 보고하라."


"잘 모르겠습니다, 각하.

고폭탄 연쇄 폭발로 인한 열 때문에 탐지기(Auspex)가 먹통입니다."


"육안으로 주변을 확인해라, 루시우스(Lucius)."


"밀폐를 풀란 말씀입니까?

지금 당장요?"


"그놈들이 일소되었는지를 확인하려면, 육안으로 확인하는 방법뿐이잖나.

게다가 발키리(Valkyrie)가 도착해서 자네를 퇴출시키려면 밀폐를 풀어야하네."


"도착 예정 시간(ETA)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각하?"


"이제 십 분도 안 남았다.

지원이 거의 도착했다, 전차병.

자, 이제 개폐기를 풀고 주변을 정찰한 뒤,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각하."


스틸로(Stilo)는 포탑 출입구로 다시 올라가 개폐기를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전차 바닥으로 뛰어내린 뒤, 살아있는 감시 장비를 총동원해서 

상타 피데(Sancta Fide) 호 주변에 녹피족(Greenskin) 놈들이 남아있는지를 찬찬히 확인했다.

탐지기(Auspex)에 보이는 놈들은 전혀 없었다.


스틸로(Stilo)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재호흡기(Rebreather)를 점검하고,

출입구 개폐기를 조심스레 연 뒤, 출입문을 살그머니 들어올렸다.


영원히 잠겨있을 것 같은 출입구가 삐꺽대며 열리자,

칼레바(Calleva) 특유의 누리끼리한 황토 빛이 가는 틈 사이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그 바람에 스틸로(Stilo)의 고글이 

착용자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갑자기 검게 변했다가 점차 조절되었다.


그는 신중하게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작열하는 태양빛 때문에 가늘어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어떻게든 먼지 구덩이 속을 살펴보려 애썼다.


살아 움직이는 오크(Ork) 차량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리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들어보았다.


고요했다.

고폭탄이 터진 후 들리는 둔탁한 공기 울림을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칼레바(Calleva)의 대기는 밀도가 낮았기에 연사에 따른 포연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스틸로(Stilo)는 조금 더 용기를 내 포탑 출입구를 젖혀 올렸다.

그러자 주변 광경이 더 잘 보였다.


먼지가 걷힌 황무지 위 먼지 구덩이에는 

선행하던 오크(Ork) 순찰대가 산산이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다.

조각조각 바스라져 고철이된 워바이크(Warbike)와 워버기(Warbuggy)들 사이로 

갈기갈기 찢겨진 녹피족(Greenskin)들의 육체가 나뒹굴었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흩어진 이들의 오장육부와 사지들 중 일부는 여전히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뒤면 이들은 이 황무지를 뒤덮고 있는 먼지의 일부로 변할 것이다.

그가 이들을 전멸시켰다.


알프하으르드(Alphard) 제 5 전차 연대,

제 3 소대 소속 장전수,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

바로 그가 해냈다.


그것도 처음으로 나간 전선 정찰 임무에서,

상타 피데(Sancta Fide) 호의 다른 승무원이 모조리 절명(絕命)한 상황에서 얻어낸 쾌거였다.

아드레날린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과거 참된 병사였던 그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참된 전차병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는 머리를 뒤로 홱 젖힌 채,

칼레바(Calleva)의 옅고 어둑한 대기 사이를 뚫고, 

누리끼리한 빛을 내뿜는 펑퍼짐하고 뚱뚱한 태양을 향해 승리의 함성을 외쳤다.


황제 폐하의 인도와 은총 덕에 그가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다.


스틸로(Stilo)는 자신도 모르게 주포 옆면을 손으로 찰싹 때렸다.

플라스틱강(Plasteel) 표면은 아직 뜨거웠다.


"우리가 해냈어,"


그가 기쁘게 외쳤다.


"우리가 해냈다고."


차량 안에서 무전기(Vox) 호출음이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호출을 무시하며,

그가 이뤄낸 첫 전투의 승리를 홀로 만끽했다.


먼지가 밀려나며 시야가 확보되자,

저 멀리 구름을 뚫고 인피니티(Infinity) 다리의 아치형 몸통이 보였다.

다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눈에도 다리 기저부에서 치솟는 여러 불빛들이 보였다.

다양한 크기의 색색들이 불꽃들이 제멋대로 솟구치다 사라졌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니, 

거대한 다리 주변을 날아다니는 날파리나 하루살이 같은 것들은

은색으로 빛나는 제국의 항공기였다.


스틸로(Stilo)는 항공기를 식별하려 애썼다.

머으러더(Marauder)인가, 

어쩌면 썬더 볼트(Thunder bolt), 

혹은 발키리(Valkyrie)일지도 몰랐다.

저들 중 하나가 그를 구조하러 올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병들을 다리 근처에 내려준 뒤, 그를 여기서 퇴출시키기 위해 날아올지도 몰랐다.


갑자기 다리가 거대한 거인이 몸을 떠는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리는 여전히 그 거대한 자태를 뽐내며 걸려있었다.


방금 전의 폭발과 진동으로 다리의 거대한 부분이 

현실에 존재하는 지옥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용암 계곡, 

대륙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게 스틸로(Stilo)의 눈에도 분명히 보였다.

그럼에도 다리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도 예전에 인피니티(Infinity) 다리가 외계인의 작품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토록 파괴하기 어려운 걸 보면, 

인피니티(Infinity) 다리가 외계인이 만든 구조물이라는 풍문이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다리와의 거리가 어찌나 멀었던지,

조금 전 다리를 휘청 꺾이게 한 대규모 폭발의 여파가 

이제야 그를 통과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의 먼지를 뚫고 뒤로 퍼져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폭발의 여파가 아련하게 등 뒤로 사라질 무렵,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수많은 엔진 소리가…


그는 공포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스틸로(Stilo)의 머리는 지금 당장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근육이 뒤로 돌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몸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고정된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에게는 이번이 첫 번째 전선 정찰 임무였다.

그는 상타 피데(Sancta Fide) 호를 포위했던 녹피족(Greenskin)들이 

오크(Ork) 전투단 전부인 줄 알았다.

그는 황야에 흩어진 놈들의 시체를 봤을 때,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삼십 여대의 워바이크(Warbike)와 워버기(Warbuggy)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한 오크(Ork) 병력 전체라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스틸로(Stilo)는 억지로 몸을 돌렸다.

그의 등 뒤에는 진짜 오크(Ork) 전투단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덜컹대는 금속성 소음과 검은 연기가 하늘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고,

각종 고철더미를 얼기설기 얽어 놓은 듯 한 다양한 차량들 사이로 녹색 피부를 가진 존재들이 

튀어나온 어금니를 내어 보이면서 미친 듯이 웃고, 떠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배틀 왜건(Battlewagon)과 워트럭(Wartrukk)에 가득 찬 녹피족(Greenskin)놈들이

저마다 쇳조각을 두들기며 제멋대로 외쳐대는 소리가 

스틸로(Stilo)의 귓가에서 투견들이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으르렁 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전차 안으로 뛰어들며 허겁지겁 출입구 개폐기를 닫은 뒤,

무전기(Vox) 송화기를 검잡아 나꿔챘다.


"발키리(Valkyrie)는 대체 어디 있습니까?

수천 마리가 떼로 몰려옵니다."


"상황을 보고하라, 전차병, 이상."


무전기(Vox) 반대편의 목소리는 이제 냉혹하다고 느껴질 만큼 침착했고,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스틸로(Stilo)는 생각 같아선, 

마이크 저편에 있는 군단장의 멱살을  부여잡고 악다구니를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에 상황을 보고했다.


"오크(Ork) 순찰대는 전멸했습니다.

하지만 오크(Ork) 본대가 접근 중입니다.

예상 도착 시간(ETA) 약 2 분입니다."


"다리는, 다리는 어떻게 됐나?"


"아직 멀쩡합니다, 각하."


무전기(Vox) 반대편에선 잠시 침묵만 흘렀다.


"퇴출팀 도착 예정 시간(ETA)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각하?"


"3 분 내로 발키리(Valkyrie)가 그곳에 도착한다, 전차병."


"오크(Ork) 본대가 그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각하."


"그럼 제군이 발키리(Valkyrie)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서 적을 막아내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각하."


스틸로(Stilo)는 무전기(Vox) 송화기를 내던지고

포탑 선회용 손잡이를 미친놈처럼 마구 돌리기 시작했다.

포탑을 뒤로 돌리는 와중에도

두터운 플라스틱강(Plasteel) 장갑벽을 뚫고,

그를 향해 쇄도하는 오크(Ork)들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스틸로(Stilo)는 50 초 이내에 선회용 손잡이를 사용해 수동으로 포탑을 180 도 회전시켜야 했다.


스틸로(Stilo)는 절망적으로 느리게 돌아가는 포탑을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해 손잡이를 돌렸고, 

헐떡이는 와중에도 한 바퀴 돌릴 때마다 숫자를 셌다.


"…39 천하나, 40 천하나, 41 천하나."


그는 탐지기(Auspex)를 보지도 않고,

일단 탄약고부터 열어 고폭탄을 꺼낸 뒤, 포미에 고폭탄을 넣고, 약실을 폐쇄했다.

장전이 완료되자마자 그는 탐지기(Auspex) 화면을 살폈다.


녹피족(Greenskin)놈들이 바로 그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스틸로(Stilo)는 필사적으로 앙각 조절기를 돌려, 

전차 주포의 포구가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워트럭(Wartrukk)과 배틀 왜건(Battlewagon) 그리고 워트라이크(Wartrike)를 향하도록

포신을 최대한 아래로 내렸다.


"발사"


반동 제어, 완료, 재장전, 발사.

반동 제어, 완료, 재장전, 발사.

반동 제어, 완료, 재장전, 발사.


쾅, 쾅, 쾅.


적의 첫 공격은 우현에서 시작되었다.


쾅, 쾅, 쾅.


뒤이어 좌현에서도 공격이 시작됐다.


스틸로(Stilo)는 주포 조작을 멈추고 적의 공격을 확인했다.

적들은 측면 포대를 노리고 있었다.

녹피족(Greenskin)놈들은 상타 피데(Sancta Fide) 호를 껍질째 찢어발기려 하고 있었다.

스틸로(Stilo)에겐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생각하지 않고 바로 행동했다.


오크(Ork)놈들이 망치와 도끼, 그리고 곤봉 등 잡히는 모든 것으로 표면을 두들겨대는 바람에

전차 구조 전체가 비상벨이 울리는 것처럼 시끄럽게 울어댔다. 

심지어 바로 그의 눈앞에서 

플라스틱강(Plasteel) 장갑이 물리적으로 눌려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전투는 근접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


스틸로(Stilo)는 우선 우현 중형 볼터(Heavy bolter) 손잡이를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냥 허공으로 볼터(Bolter)탄을 흩뿌렸고, 

그러면 창공에 가득한 메뚜기 떼를 후려치듯 알아서 탄이 명중했다.

빈 약협이 반짝이며 그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녹피족(Greenskin) 머저리들은 피할 생각도 안하고, 

한 놈씩, 한 놈씩, 사선에 직접 머리를 디밀고는 피보라를 일으켰다.


이건 마치 무더운 한여름 밤, 

날벌레들이 만연하는 도로에 차를 몰고 달리면, 

앞 유리에 벌레들이 무수히 들러붙는 상황처럼 보였다.

워낙 지근거리에서 중형 볼터(Heavy bolter)탄이 폭발했기 때문에

녹피족(Greenskin) 놈들을 갈기갈기 찢는 충격이 총신을 타고 그의 손에 전해질 정도였다.


스틸로(Stilo)는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중형 볼터(Heavy bolter) 총구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사격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건 아무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우현 중형 볼터(Heavy bolter) 조준경을 통해,

오크(Ork)들이 산개했다가 다시 모여드는 모습이 보였다.

방해가 되는 아군 시체들을 마구잡이로 주변으로 치운 뒤, 대열을 다잡고는 

다시금 그를 향해 돌진해왔다.


"잔탄 없음!"


상타 피데(Sancta Fide) 호가 쇄도하는 녹색 물결의 공격에 휩쓸린 바로 그 순간,

스틸로(Stilo)는 소리를 지르며, 훈련받은 대로 행동했다.


전차는 이제 수백여 개의 도끼질과 주먹질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플라스틱강(Plasteel) 장갑은 속수무책으로 비명만 질러댔다.

이제 전차는 오크(Ork)들의 손에 이끌려 앞뒤로 마구 흔들렸다.

이놈들은 전차 장갑을 뜯어내 말 그대로 그 내장을 밖으로 뽑아내길 원했다.


"사방에 다 적들입니다!"


스틸로(Stilo)는 무전기(Vox)에 소리를 지르면서, 

좌현 중형 볼터(Heavy bolter)로 몸을 날렸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스틸로(Stilo)는 좌현 중형 볼터(Heavy bolter) 방아쇠를 움켜쥐었다.

볼터(Bolter)탄이 빠르게 소진되면서 빈 약협이 작은 금속음과 함께 발치에 쌓이자,

방금 전, 어둠 속에 홀로 쓰러져있던 그를 깨워준 냉각기 소음이 떠올랐다.


상타 피데(Sancta Fide) 좌현에 남아있던 녹피족(Greenskin) 놈들은 많지 않았다.

스틸로(Stilo)가 볼터(Bolter)를 쉴 새 없이 휘두르자 그 숫자도 금세 줄어들었다.


하지만 오크(Ork)들은 끝없이 몰려들었다.

볼터(Bolter)의 발포음과 파열음, 그리고 생살이 타는 자극적인 악취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전차를 향해 더 많은 오크(Ork)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오크(Ork)들 중에 하나가 달려들더니 중형 볼터(Heavy bolter)의 총구를 맨손으로 잡아챘다.

총구의 열기 때문인지 오크(Ork)의 손에선 연기가 솟구쳤다.

하지만 이놈은 끝까지 총구에서 손을 떼지 않더니,

동료들이 총을 맞지 않도록, 총신을 머리 위로 높게 밀어 올렸다. 


스틸로(Stilo)는 비명을 지르며 허리춤에서 라즈 권총(Laspistol)을 꺼내들었다.

그는 총안으로 권총을 내밀고는 신중하게 오크(Ork)의 눈을 겨냥했다.

그러나 첫 번째 오크(Ork)가 스러지자마자, 

바로 다른 오크가 첫 번째 오크(Ork)의 자리를 차지하고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쓰러지자 세 번째 오크(Ork)가 자리를 메웠다.


세 번째 놈은 자신의 코 위에 왜 구멍이 생겼는지 그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양 눈을 모들뜨기로 뜨고 한참을 서있더니, 

제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다.


곧 다른 오크(Ork)가 자리를 차지하고 중형 볼터(Heavy bolter)를 들어올렸다.


스틸로(Stilo)는 다시 중형 볼터(Heavy bolter)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마지막 오크(Ork)는 볼터(Bolter)탄을 세 발이나 맞고 나서야,

새빨간 안개와 함께 녹색 슬라임으로 변해버렸다.

머리가 증발하면서 튀겨져 나온 놈의 이빨이 뒤늦게 떨어지면서 

상아색 칼날처럼 차체 표면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분노와 승리의 열망을 담은 스틸로(Stilo)의 전투 함성과 함께 볼터(Bolter)가 다시 불을 뿜었다.

그는 끝없이 몰려드는 버러지 같은 오크(Ork)떼를 영거리 사격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그가 오크(Ork)를 학살할 때마다, 

더 많은 놈들이 그가 지키지 못하는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전차는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크(Ork) 워보스(Warboss)가 이 흥겨운 잔치에 참석했다.

그는 멀찍이 지켜보는 대신, 직접 이 잔치에 참석하는 쪽을 택했다.


갑자기 전차가 바닥에 처박히나 싶더니 높게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전차가 위아래로 춤을 출 때마다 더 많은 오크(Ork)들이 다가와서는, 

전차가 더 높게 날아오르도록 던져댔다.


스틸로(Stilo)는 전차 안에서 무력하게 이리저리 날아다니지 않도록 

주변을 꽉 잡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빌어먹을 발키리(Valkyrie)는 대체 어디 있습니까?"


그는 무전기(Vox)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이놈들이 절 으깨기 직전입니다."


"버텨내라, 아들아,"


대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폐하께서 보우해 주실 거다."


상타 피데(Sancta Fide) 호는 결국 오크(Ork)의 던지기를 버티지 못하고 전복되었다.

스틸로(Stilo)가 있던 좌현 측면 포탑은 심하게 찌그러지더니,

짓누르는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전차 측면 포탑은 금이 가면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미 전차 바닥에 깔려있는 프로메슘(Promethium)에

새어나온 추진체가 섞이면서 특유의 독특한 냄새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탐지기(Auspex)는 아직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화면은 온통 회색과 붉은색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스틸로(Stilo)는 지직거리는 화면을 통해

워보스(Warboss)가 양손 손가락들을 소리 나게 꺾고, 

목을 좌우로 흔들면서 거들먹거들먹 전차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워보스(Warboss)는 포탑 출입구를 단단히 잡아챘다.

전차가 모로 넘어진 상황이기에, 이 거대한 오크(Ork)는 손쉽게 포탑에 다가설 수 있었다. 


"놈이 들어오려고 합니다,"


스틸로(Stilo)는 무전기(Vox)에 속삭였다.


출입구가 삐걱거리면서 개폐기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지만,

잠금 장치는 이 모든 상황을 버텨냈다.


워보스(Warboss)는 뒤로 슬쩍 물러났다.

이 괴수는 뭔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눈치 챘는지,

고개를 돌려 감시 장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스틸로(Stilo)는 놈의 두 눈에서 사악한 간계가 넘쳐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워보스(Warboss)는 갑자기 주변에 서있던 오크(Ork)들 중 하나를 잡아채더니,

발버둥치는 놈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워보스(Warboss)는 아무런 전조나 경고도 없이 그 오크의 목을 그대로 잡아 뽑았다.

부지불식간에 머리가 사라진 녹피족(Greenskin)의 몸은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워보스(Warboss)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감시 장치 앞으로 들이밀더니,

다시 포탑으로 올라가서 출입구를 단단히 낚아챘다.

워보스(Warboss)는 상타 피데(Sancta Fide) 호의 포탑을 통째로 잡아 뽑으려는 심산이었다.


스틸로(Stilo)는 전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죽기 직전,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차디찬 시체로 변하기 직전, 

영혼이 귀신으로 변하면서 떠나길 거부하고 희읍(欷泣)하듯이

계령(Machine spirit)이 차체에서 떠나길 거부하면서 흐느끼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전기(Vox) 송화기를 쥐고 속삭였다.


"발키리(Valkyrie)는 여기 오지 않아요, 그렇죠?"


무전기(Vox)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더-더 이상 사탕발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곧 죽을 테니까요."


무전기를 통해 결코 전부 전해질 수 없는 무겁고 탁한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그분의 발키리(Valkyrie)들을 네게 보내주실거다, 아들아.

그들이 널 폐하의 옆자리로 안내할거야."


"폐하께 제가 가는 길에 선물을 가져간다고 전해주세요."


입으로 말을 하는 와중에도 스틸로(Stilo)의 손은 바쁘게 주포용 탄약고를 뒤졌다.

철갑탄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고, 고폭탄도 아직 소수가 남아있었다.


탄약들은 모두 케이스에 담긴 채, 유폭을 방지하는 안전장치가 걸려있었다.

계령(Machine spirit)이 전차를 지키는 동안에는 

지근거리에서 폭발탄이 폭발하거나 관통탄이 차체를 관통한다 하더라도,

오폭된 탄의 폭발에 휘말려서 적재된 탄약이 유폭되는 대참사가 일어나는 대신, 

특별하게 제작된 차내 폭발공(爆發孔)을 통해 오폭으로 인한 폭염과 폭압 대부분을 

자동적으로 외부로 배출하는 방식으로 차내의 안전을 확보했다.


하지만 탄약통 케이스가 무방비로 열려있는 경우엔,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노출된 탄약 전체가 유폭해서 포탑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폭발을 유발할 수 있었다. 


포탑은 점차 바깥쪽으로 당겨져 툭 불거졌고,

잠금 장치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주 서서히 부서져갔다.

전차가 참지 못하고 토해내는 단말마적 비명이 차체를 뒤흔들었다.


스틸로(Stilo)는 라즈 권총(Laspistol)을 꺼내 살펴보았다.

전지 잔량은 이제 10 퍼센트(%) 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무기로 워보스(Warboss)를 상대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에게는 진짜 무기가 필요했다.


스틸로(Stilo)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무전기(Vox)가 고장 났을 때를 대비한 색색들이 신호탄이 여러 발 있었지만,

워보스(Warboss)는 이런 장난감에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만신창이가 된 전차 바닥에서 넝마처럼 제멋대로 구르고 있는 

바으릇테즈코(Bartezko) 대위의 시체가 보였다.


어둑한 붉은 비상등 불빛 아래에서 

대위의 허리춤에 매달린 파워 소드(Power sword)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앞길을 막고 있는 각종 잡동사니를 마구 헤치며 나아가 칼을 잡아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마침내 잠금장치가 부서지면서 포탑 출입구가 열렸다.

워보스(Warboss)는 상타 피데(Sancta Fide) 호의 포탑 구멍으로 

거대한 머리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스틸로(Stilo)가 파워 소드(Power sword)의 전원을 넣자,

아주 오래된 칼날 표면이 변하더니, 윙윙 소리와 함께 강렬한 에너지가 도신을 타고 흘렀다.

스틸로(Stilo)는 맥동하는 칼날을 으르렁대는 오크(Ork)의 양미간 사이로 꽂아 넣었다.

파워 소드(Power sword)는 녹피족(Greenskin)의 살을 게걸스럽게 탐하며 

두터운 오크(Ork)의 두개골 안쪽까지 깊게 파고들어 갔다.


워보스(Warboss)는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전차 밖으로 머리를 빼냈다.

괴수의 비명소리치고는 어울리지 않게 계집애처럼 새된 목소리라는 생각이 

스틸로(Stilo)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뜯겨 나간 포탑 출입구의 둥근 구멍을 통해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는 외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밖으로 도망친 워보스(Warboss)는 비틀거리더니 황야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개골에 박힌 칼날을 뽑으려고 양손을 버둥거렸다.

그럼에도 워보스(Warboss)는 스러지지 않았다.


결국 칼끝에 손이 닿은 워보스(Warboss)는 양손으로 파워 소드(Power sword) 손잡이를 잡았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 괴수는 자신의 두개골을 관통한 칼날을 스스로 뽑아냈다.


스틸로(Stilo)는 뜯겨나간 포탑 출입구 구멍을 통해,

이 충격적인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워보스(Warboss)는 킁킁대며 뽑아낸 파워 소드(Power sword)의 냄새를 맡더니,

혀로 칼날을 핥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괴수는 전차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 괴수는 스틸로(Stilo)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괴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발로 황야를 단단히 디디고 일어섰다.


괴수는 다시금 스틸로(Stilo)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갑자기 괴수의 입 꼬리가 올라가더니 누리끼리한 이가 드러났다.

스틸로(Stilo)는 저 모습이 오크(Ork)가 웃는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워보스(Warboss)는 흥미를 잃은 듯,

파워 소드(Power sword)를 옆으로 던져버리고는 

상타 피데(Sancta Fide)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오크들은 공포와 흥분 속에서 숙덕이면서 워보스(Warboss) 뒤를 따랐다.


스틸로(Stilo)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전차의 가장 깊숙한 구석에 처박혔다.


"폐하의 발키리(Valkyrie)들이 오고 있는 게 맞죠?"


"그들은 이미 너와 함께 하고 있단다."

 

스틸로(Stilo)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워보스(Warboss)는 이번엔 포탑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밀지 않았다.

대신 전봇대처럼 굵다란 팔을 넣어, 

항아리 속에 떨어진 아람을 줍듯 두터운 손가락으로 스틸로(Stilo)를 잡아채려 했다.


루시우스(Lucius)는 필사적으로 뒤로 몸을 빼며, 

괴수의 손길로부터 멀어지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직접 들어와서 날 잡아보시지,"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신호탄 보관소를 더듬었다.


워보스(Warboss)는 팔을 다시 잡아 빼더니, 구멍 밖에서 전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핏발이 선 놈의 붉은 눈 위로 녹색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

장전수, 

제 3 소대,  

알프하으르드(Alphard) 제 5 전차 연대 소속인 그는

포탑 구멍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채,

그를 쏘아보고 있는 워보스(Warboss)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눈을 지릅뜨고 눈심지를 빳빳하게 세워 괴수를 마주보았다.


그의 다리 아래에는 새어 나온 프로메슘(Promethium)이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고,

방폭 케이스에서 꺼내진 고폭탄과 철갑탄 무더기가 안전장치마저 제거된 상태로 바닥에 깔려 있었다.

루시우스(Lucius)는 포탄과 프로메슘(Promethium) 위에 걸터앉아,

표독스럽게 워보스(Warboss)를 향한 눈을 번쩍이며, 

신호탄을 집어 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신호탄을 점화했다.


그 신호탄은 

루시우스 스틸로(Lucius Stilo)가 지금껏 봐온 그 어떤 빛보다 더 환하게 불타올랐다.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웅덩이에 빠져든 신호탄은 좀 전보다 더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의 귀에 더 이상 폭발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상타 피데(Sancta Fide) 호의 포탑은 대량의 유폭으로 인한 폭압으로 날아올랐다.


상타 피데(Sancta Fide) 호가 위치했던 계곡 밖에서도 

전차에서 솟구친 거대한 하얀 불꽃이 황야의 표면을 정화하는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전차 주변에서 서성이던 워보스(Warboss)와 오크(Ork) 무리들은 

순식간에 화염에 삼켜져서 검은 숯덩이로 변해버렸고, 

주위에서 공회전을 하던 워트럭(Wartrukk)과 배틀 왜건(Battlewagon)들은 하나씩 유폭에 말려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전선 정찰을 나선 젊은 전차병의 영혼이 

살아남은 차량들마저 저승길 길동무로 데려가려는 듯이 차량에서 차량으로 폭발이 계속 이어졌다.




제 4 기갑 군단 사령부의 참모진들은 침묵에 빠졌다.


무전기(Vox)는 침묵하고 있었다.

무전이 끊어지기 직전,

이곳의 모든 병사와 장교들은 전차병이라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바로 르망 러스(Leman Russ) 전차가 완파될 때, 

마지막으로 들리는 특유의 소리였다.


제 4 기갑 군단 군단장인 마으르커스 스틸로(Markus Stilo) 대령은

침묵하고 있는 무전기(Vox)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통신소(Vox-station)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을 보고해라."


"발키리(Valkyrie) 편대가 다리를 폭파할 폭발물과 장약을 성공적으로 운송했습니다.

급파된 공병들이 지금 현장에서 작업 중입니다."


"편대에게 귀환하지 말고 작전구역에서 활공하다가 

다리의 파괴가 확인되는 즉시 공병들을 데리고 안전하게 퇴각하도록 명하게."


통신 장교는 즉시 무전기(Vox)로 돌아서서 군단장의 명령을 하달했다.


마으르커스 스틸로(Markus Stilo) 대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모진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서서, 군단장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임무는 저 다리를 파괴하는 거다.

때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희생시켜야만 하지.

황제 폐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힘든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기대에 화답하는 한, 인류 제국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대령은 천천히 사령부 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근엄한 표정과는 달리, 공허한 그의 눈은 멍해 보였다. 


"내 아들은 언제나 전차병이 되기를 꿈꿔왔다.

그리고 그는 전차병으로 생을 마쳤다."


말을 마친 대령은 애써 자세를 유지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곧 자세를 다잡고 굳건히 제자리에 섰다.


"각하, 발키리(Valkyrie) 편대에게 시체… 

아니, 자제분의 유해를 회수하도록 명령할까요?" 


대령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발키리(Valkyrie) 편대는 기존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한다.

다리가 무너지면 내게 즉각 보고하도록, 

임무를 속행해라, 이상."






댓글

  1. 오랜만에 보네요. 이거 참 안스러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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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글루스때 한번 올렸었죠.
      전쟁은 누구에게나 비극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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